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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은이 Feb 03. 2023

설렘은 식욕을 잃게 만든다


  항공권이 열렸다는 말에 여행을 가려고 냉큼 항공편을 뒤졌다. 일정을 정해야 하는데 이것저것 고려하다 보니 괜찮은 날이 없었다. 치앙마이의 날씨는 12월부터 여행하기 좋다는 글을 보고 크리스마스 전후로 항공권을 알아 보았다. 올해 크리스마스는 연인과 함께 보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마 올해 크리스마스뿐만 아니라 내년도, 내후년도.


  나이가 들고 세월이 흐를수록 사람 만나기란 쉽지 않다.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사람 옆에 있을 때 가장 밝게 빛날 수 있는지, 또는 가장 빛을 잃을 수 있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이별을 겪고 난 뒤로는 더욱 조심스럽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는 것 자체가 두려운 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사랑의 대가가 이별의 사무침이라면 굳이 내 발로 지옥 속을 걸어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성애자이기 때문에 내가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지구상의 70억 인구 중의 35억 정도의 남자들일테지만, 사실 그 숫자는 나의 생활 반경에서는 너무나도 무의미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평생 내 편이 되어 줄 딱 한 사람을 만나기가 이렇게 어렵다니. 셋도 아니고 둘도 아니고 '딱 한 사람'만 있으면 되는데. '딱 한 사람' 찾기가 복권에 비등할 정도로 어려운 일임을 알게 된 후로 기대를 버렸다. 평생 혼자 살 수도 있겠구나, 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혼자 살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친구가 되어야 했다. 그 뒤로 혼자 시간을 보내고, 어떤 일이든 혼자 해내는 버릇을 들였다. 누구에게도 기대하지 않고 스스로에게 기대는 사람이 되고자 했다.


  그렇게 항공편을 예매하기 위해 다음 달 월급날만 기다리고 있는데, 뜻밖에도 어떤 사람이 성큼 내 안에 걸어 들어왔다. 멋진 목소리와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눈을 가진 사람이었다. 회의가 끝나기 전 ‘우리 동네에 놀러 오세요'라며 던진 나의 미끼를 기다렸다는 듯이 물어버린 이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신림에서 분당까지 한 시간 반이나 걸려 우리 동네로 왔다. 그러고는 목이 쉬어라 실컷 이야기하고 깔깔 웃다가 막차를 놓쳐 택시를 타고 갔다. 그리고는 삼일 후에 우리는 또 만났다. 이번에는 내가 택시를 타고 귀가했다.


  회사에서 마주치니 민망하면서도 괜히 도전의식이 생겨서 그 사람을 빤히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온몸에 털이 쭈뼛하고 설 정도로 짜릿했다. 담배를 물고 건물 뒤편으로 홀연히 사라지는 뒷모습, 라운지 옆 자리에 앉아 회의에 열중하는 목소리,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쳐다보면 그도 날 쳐다보고 있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뒤로는 혹시 지금 타려는 엘리베이터 안에 그가 있진 않을까 기다리게 된다. 피곤해 보인다며 묻는 동료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보며 '나랑 어제 같이 있었어'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좋아할 것 같다며 빌려 준 책이 사무실 책상에 놓여 있는 걸 볼 때마다 마음이 간질거린다. 그는 알까. 책을 빌려 주는 행위가 상대에게 얼마나 자극적으로 다가오는지. 출퇴근길에 읽고, 자기 전에 읽고, 친구를 만나러 갈 때 읽고, 일상의 매 순간에 자꾸 당신을 떠올리게 만드는 행위라는 걸 절대 가늠도 못할 것이다.


  나이가 들면 설렘이라는 감정을 느끼기 힘들어진다는데, 또는 아직도 사랑이라는 감정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는데, 어째서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지. 마음을 다 쏟아 제풀에 지쳐 쓰러지는 내가 원망스러울 때가 있다. 그러나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벅차오르는 이 감정을 다신 느낄 수 없다면, 나에겐 더 이상 삶의 의미는 없을 것이다.


  어제 그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설레서 자꾸 웃음이 나온다. 이 감정은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게끔 손발을 꽁꽁 묶어 놓는다. 어린 왕자의 여우는 네 시에 만나자고 하면 세 시부터 기다린다고 했던가. 나는 세 시의 만남을 전 날 세 시부터 기다린다. 발을 꼼지락거리며,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식욕을 잃어가며, 도무지 알 수 없는 상대의 마음을 함부로 상상하며, 그런 내 모습이 사랑스럽고 부끄러워 입술을 깨물며.


  이렇게 나는 또다시 기대와 용기를 걸어 보기로 한다.



22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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