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은이 Dec 08. 2023

치앙마이에서의 회고

- 2번의 구조조정, 1번의 희망퇴직, 4개월의 휴직기간

  지난 했던 휴직 기간이 끝나고 새로운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포지션도 내가 희망했던 것과 비슷한 직종이었다. 물론 출근해 봐야 어떤 일을 하게 될지 정확히 알 수 있겠지만, 비슷한 일에 발이라도 담가 보려고 얼마나 애태웠는지. ‘운이 없었다’고 생각했었지만, 계속되는 낙방에 결국 ‘능력이 부족하다’ 고 여기게 되었다.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을 입 밖으로 내뱉고 나니 마음이 쓰라려 카페에서 혼자 내내 울었다. 주변에서 아무리 ‘스타트업 역대 최고의 혹한기’, ‘얼어붙은 채용’에 대해 이야기하며 위로의 말을 건네도 왠지 내 능력 부족을 합리화하게 되는 것만 같아 한 귀로 듣고 흘렸다. ‘그냥 인정하려고, 내가 부족한 거라고. 그래서 이번에도 안되면 그냥 마음 편하게 가지려고.’ 남자친구에게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털어놓았지만 감정은 숨길 수 없는지 자꾸만 울먹였다.  남자친구는 내가 가려던 포지션을 거의 중고 신입으로 가는 것과 다름없는데 어려운 것이 당연한 게 아니겠냐고, 실업급여가 종료되어도 아르바이트하면서 준비하면 된다며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 돌이켜 보니 퇴사 후 오로지 이직 준비에만 매달렸던 것 같았다. 함께 퇴사한 다른 이들은 이 기회에 하고 싶었던 것들을 시도해 보던데, 이 참에 나도 회사에 의지하지 않아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게 나만의 파이프라인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러다 운 좋게도 곧 수익이 생겼고, 한동안은 그 일에 매진했다. 나를 찾아 주는 이들을 보니 그래도 조금의 여유가 찾아와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누군가는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 시간에 원하는 포지션에 합격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낫지 않겠냐고. 하지만 나는 더는 그곳에 힘을 쓸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내 힘이 여기까지인 거겠지. 이직이 인생의 전부는 아닐 거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렇게 힘을 빼고 있으니 이상하게도 마지막으로 지원했던 2곳에서 합격 연락이 왔다. 이렇게 휴직 4개월 동안 총 5곳의 연락을 받았고, 지난 합격 문자에 응하지 않아 후회했던 일이 무색할 만큼 좋은 연봉 조건으로 입사하게 되었다. 이전 회사보다는 규모는 작고 경직된 조직 문화를 가지고 있었지만, 사실 어떤 환경이든 상관없었다. 2번의 구조조정, 1번의 희망퇴직, 4개월 간의 쉴 새 없는 지원과 낙방을 견뎌 왔기에 앞으로 벌어질 예측하기 어려운 일들은 나에게 크게 걱정거리가 되지 않았다.


입사일을 결정하고 지난날들을 돌이켜보니 처음으로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길게 쉴 수 있는 날이 이제 당분간 없을 텐데, 1분 1초를 너무 불안과 다독임의 반복으로 살아왔던 건 아닐까. 살면서 오래 쉼을 가져 본 적이 있었던가. 아무 걱정 없이 침대에 누워 본 적이 요 근래 있었던가. 그 생각을 하니 떠나야겠다는 결심이 들었다. 이사할 때 보태려고 아껴 두었던 퇴직금을 눈 질끈 감고 깨버렸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가고 싶었던 치앙마이 항공권을 예매했다. 혼자 가는 치앙마이를 상상한 지 1년 만에 행동으로 옮기다니. 앞으로는 너무 길게 끌지 말자고.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자고 생각했다.


처음 가는 해외여행이라 국제 미아가 되진 않을까 참 많이 걱정했지만, 지금 나는 치앙마이의 어느 한 카페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누군가에겐 혼자 떠나는 해외여행은 별일 아닐지 몰라도 나에겐 꽤 용기를 낸 일이라, 낯선 타지에서 되지도 않는 영어를 쓰며 작은 배낭 하나 짊어지고 선글라스를 낀 채 뚜벅뚜벅 걷는 내가 종종 사랑스럽다. 불행 중 다행인 건지 내가 완벽히 구사할 수 있는 언어는 한국어 밖에 없어 주변에서 아무리 떠들어도 나에겐 ASMR로 들린다는 거.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에서 모국어가 들리지 않는 공간을 간다는 것에 대해 서술된 구절이 있는데, 모국어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이 나에게도 꽤 깊은 휴식을 가져다 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어폰도 끼지 않고 가져온 책은 그저 펼쳐 두기만 한 채 내내 멍만 때리는 이 시간이 소중하다. 아마도 이 시간을 떠올리며 앞으로 내가 살아내야 할 시간들을 견뎌낼 것임을 알고 있기에. 과거를 후회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온전히 이 시간을 만끽하려 한다.


- 2023.12.08 치앙마이 ‘The story 106 co-working space & cafe’에서

(오랜만의 통화에서 자신감 없는 내 말을 듣고 혼냈던 친구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작가의 이전글 또다시, 순간에 기대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