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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즈더밍 Jun 24. 2020

아뿔싸, 아뿔싸!

 며칠 전부터 부쩍 짜증이 늘었다. 이른 아침에도 살갗의 온도가 떨어지지 않는다. 왜 이러지? 나 왜 이렇게 뜨거운 거야? 찬물로 촐싹거리며 샤워를 해도 물과 닿은 그 순간뿐이다. 선풍기에 바람을 쐬면서 머리를 말리고 나면 인중에 송골, 하고 뜨거운 증기가 피어난다. 젠장. 달래지지 않는 나를 다독이며 좋아하는 카페에 가기로 했다. 커피 한 잔 하면 좋아질 거야, 분명!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자꾸만 처지는 내 마음을 일으키려 고군분투했다. 그러나 카페에 도착과 동시에 전투력은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아뿔싸. 다들 한낮을 피해 카페를 피난처 삼아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커피를 주문하고 내가 좋아하는 자리에 앉아 짐을 풀었다. 영상 하나만 만들고 집에 가야지, 라는 가벼운 생각이었다. 사진부터 정리할 요량으로 핸드폰을 뒤적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아이가 빽- 하고 울었다. 아뿔싸. 다급한 부모의 외침과 함께 아이의 소리는 잦아들었지만 이내 아기 상어의 노래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뿔싸. 진정하려 했던 내 안의 불쾌지수가 꾸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세상은 나를 쫓아내려는 듯 갑자기 단체 손님이 몰려와 큰소리로 서로를 부르며 떠들기 시작했다. 아뿔싸. 이것은 빨리 집으로 도망치라는 신의 계시다. 풀었던 짐을 뒤죽박죽 가방에 쑤셔 넣고 부리나케 카페를 나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소파에 던졌다. 민첩하게 선풍기를 꺼내 중풍 회전으로 세워 두고 에어컨은 25도 강풍으로 설정했다. 후, 하고 깊은 날숨을 한 번 더 내뱉고 싱크대에서 손을 씻었다. 1분이나 지났을까? 소파의 짐을 정리하려 몸을 돌리는 순간 깜짝 놀랐다.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쾌적해진 거실의 공기 때문이었다. 짐 정리를 하다 말고 소파에 기대 누웠다. 이게 뭐람. 결국 에어컨이었다니. 찬물을 들이붓고 밖에 나가 몸을 놀리며 커피를 들이부어도 찾지 못한 그것을 에어컨이 단번에 가져다줬다. 이 날씨부터 에어컨을 틀면 밖은 더 더워질 텐데, 북극에 사는 커다란 곰이 살 곳을 잃어간다는데... 나는 기진맥진한 채로 중얼거리다 스르륵 잠이 들었다.

  늦은 밤 잠에서 깬 나는 산책을 나갔다. 고요해진 길을 걸으며 오늘의 뜨거웠던 시간에 대해 생각했다. 아직도 남아있는 내 몸의 미열을 느끼면서, 어디로 튈지 몰랐던 나의 분노에 대해. 안녕한 날들을 보내고 있다 자부하던 내가 성난 황소처럼 길길이 날뛰다 에어컨의 쾌적한 바람 앞에서 잠든 아이처럼 온순해지는 기이한 오늘의 하루. 내가 이렇게나 변덕스럽고 줏대 없는 인간이었다니!


  부정하고 싶은 마음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하늘 사이로 평소보다 한층 짙고 넓적해진 잎사귀들이 보였다. 어라? 분명 연둣빛의 작은 이파리였는데, 언제 이렇게 초록빛으로 변한 거지? 크기는 또 어떻고? 주렁주렁 자두만 한 열매도 달렸잖아! 도대체 며칠 사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별안간 커버린 나무를 마주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어디선가 시원하고 묵직한 바람이 불어왔다. 아뿔싸!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아. 나무는 뜨겁게 달궈진 낮을 양분 삼아 밤이면 몸집을 키우며 쑥쑥 자라고 있었구나.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나무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오늘 내게 나무가 보여준 모습을 고이 간직해야지. 사진에 '연두에서 초록, 여름, 침묵, 성장'이라고 메모했다. 자두만 한 열매는 명자나무의 열매로 뜨거운 여름날을 지나며 향은 짙어지고 색은 노란빛으로 변한다고 한다. 산책 중 간질이는 명자 향을 맡게 되면 나무의 뜨거웠던 여름을 기억해야지. 그리고 무더운 한낮의 소란으로 일었던 내 안의 불쾌한 것들을 흘려보내야지. 나무처럼 나에게도 새로운 향기가 피어날 수 있게.

  세상의 작은 비밀을 찾은 것 마냥 부푼 마음을 부여잡고 다시 걷는다. 애써 참아보지만 발 뒤꿈치가 하늘로 오르며 가벼워지는 일은 참기가 쉽지 않다. 한밤중에도 열꽃이 피어나는 계절. 여름이 도달했다. 깊어지기 좋은 계절, 시원한 가을바람이 부는 날에는 더욱 말간 눈으로 살아갈 수 있길 희망하며 피식, 웃어 본다. 희망이 성큼 다가와 내게 인사한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한번 더 피식,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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