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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 18. 2020
익어간다, 물김치와 나.
딸이지만 며느리의 뒤늦게 깨달은 효도 방법
물김치 익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몇 통째 담가보니 이제는 소리만 들어도 맛이 그려지는 경지에 이르렀다. 처음 갈려진 홍고추로 인해 붉은 기만 가득했던 물김치는 익어가면서 선분홍 빛 처녀의 상기된 뺨을 상기시키듯 설렘 가득한 빛깔로 물들어가는데, 이때 소리가 맛의 정점을 결정짓는다. 푸 풉 거리는 어린아이 개구진 웃음소리 같다가도 밤에는 어딘지 모르게 서글피 들리기도 하는 그 물김치 익어가는 소리가 내 귀를 간지럽히면 물김치는 이내 처음의 풋내는 사라지고, 시큼하면서도 혀끝을 간질간질거리며 침이 싹 고이게 만드는 밥도둑으로 변신되어 있다.
처음 시작은 전단지 한 장 때문이었다.
단배추 2단에 990원이라는 문구에 홀린 듯 장바구니에 담았고, 집에 와서 보니 보관할 곳도 없고 무엇보다 당장 요리할 엄두가 안 나 이내 후회하였다. 그러던 차에 퍼뜩 생각난 것이 물김치였다. 여름 내내 물김치 하나로 끼니를 다 해결하시던 시댁에서의 식탁 풍경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친정보다 시댁의 식성을 먼저 떠올린 건 딸 같은 며느리는 못되어도 딸이지만 며느리라는 무의식과 은연중에 나를 지배하는 착한 며느리 병이라는 고질병 때문에 어쩔 수가 없나 보다.
사실 어머님은 요리에 그다지 취미가 없으셨다.
처음 시댁에서 함께 식사하며 놀랐던 것은 내가 보기엔 반찬이라고 부르기 민망했던 것들의 나열 때문이었다. 깍둑썰기 된 파프리카와 오이, 쌈채소들 이를테면 깻잎, 알배기 등이 식탁 한켠에 늘여져 있었다. 늘상 다양한 종류의 반찬통들이 가득했던 친정에서의 밥상만 보던 나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처음에는 삼겹살을 구워 먹어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거의 매 끼마다 삼겹살이 나왔고, 결정적으로 냉장고 속에 반찬통이 거의 없는 모습을 보게 된 후 요리를 귀찮아하시는구나 하고 눈치챌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들 둘을 키우며 한평생 직장에서 치열하게 사회생활을 하신 탓에 부엌에 머무르시는 시간보다는 책상 앞에 있으신 경우가 더 많아서 그런 게 아닐까 한다. 또한 요리보다는 집안 곳곳 정리 정돈이나 청소하는 것에 더 흥미를 느끼셨던 성향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어찌 되었건 그런 어머님 덕에 나는 왠지 모를 안도감 같은 것을 느꼈는데, 나에게 ‘시어머니’라는 이미지는 터질듯한 냉장고를 아랑곳하지 않고 직접 손수 담그신 김치 한 통을 기어코 넣고야 말겠다고 며느리와 실랑이하는 나날들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역시나 어머님께서는 김치는 김장김치부터 총각김치, 갓김치 등 종류별로 사서 드셨다. 그러나 물김치 하나만큼은 항상 직접 담가 드셨다. 직접 담그신 물김치를 식탁에 항상 내어놓으시고는 드실 때마다 정말 맛있다며, 직접 담그긴 했지만 스스로가 대단하다 하시며 기뻐하셨다.
남자들로만 둘러싸인 밥상에서 유일하게 같은 여자였던 나에게 어머님께서는 당신이 담그신 물김치를 권하시며 내 입에서 나오는 감탄사를 내심 기대하시곤 하셨다. 사실 어머님의 물김치 맛은 ‘그냥’ 물김치 맛이기도 했고 내 입맛에는 어쩐지 밍밍하기까지 했지만, 어머님이 기대하시는 반응은 ‘그냥’이 아닌 ‘비범’한 맛의 감탄사였기 때문에, 나는 정말 최선을 다해서 물김치의 맛이 여태 먹어본 물김치 중에 최고로 맛이 있다며 마른 입술을 연신 움직이며 맛을 표현하기 바빴다.
그랬던 내가 ‘감히’ 어머님께 물김치를 만들어 드린다? 처음에는 살짝 망설였다. 그도 그럴 것이 시댁에서 몇 번 밥상을 얻어먹은 뒤 약간의 자신감이 생긴 내가 시도했던 직접 차린 시댁에서의 첫 밥상에서의 기억 때문이었다.
갓 결혼한 초보 새댁이 호기롭게 첫 도전장을 내민 것은 놀랍게도 카레였다. 난이도 최하급 중의 최하급인 카레를 나는 연신 땀을 뻘뻘 흘려가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요리했고 정성스레 식탁에 차려내었는데, 내심 바랬던 칭찬 아니 수고했다는 말 대신 어머님의 첫마디는 “반찬도 없이...”였다. 반찬도 없이... 라니!! 카레 자체가 요리이고 반찬이 아니던가? 카레에 필요한 반찬은 김치 말고 또 무엇이 필요하다는 것일까? 그도 아니면 여태껏 어머님의 밥상에서 본 적 없던 반찬을 왜 나에게서 찾으셨던 걸까? 그 쉽다는 카레도 땀을 뻘뻘 흘려가며 요리한 초보 새댁을 어여삐 봐주실 순 없으셨던 걸까라며 오만가지 상념들이 생성되었던 그 나의 시댁 밥상 첫 도전 기억 말이다.
괜히 떠올린 지난 기억들에 얄궂은 섭섭함이 다시 고개를 내민다. 그럴 때면 나는 그 섭섭함의 바다 한가운데서 어머님과 만났던 첫 순간을 애써 떠올리곤 했다.
마침 그때는 추석 즈음이라 나는 처음 인사드릴 때 어떤 선물이 좋은지를 지금의 신랑을 닦달해가며 가장 적합한 선물을 찾느라 혈안이 되어 있었는데, 그렇게 고심해서 골랐던 선물이 잣 세 통이었다. 그것도 과대 포장되어 포장지가 80% 이상 차지하는 선물용 잣도 아닌, 그냥 낱개 포장된 잣을 3개 사서 집에 있던 종이가방에 넣어서 드린 게 다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어처구니없는 행동이었지만, 이는 어머님과 30년을 함께 해온 신랑의 설득 때문이기도 했다. 쓸데없이 과대 포장된 것들을 싫어하고, 실용적인 것을 좋아하신다는 어머님은 선물도 본인에게 마침 필요한 걸로 받으시는 걸 좋아하신다고 하여 신랑이 슬쩍 어머님께 떠본 결과 당장 잣이 필요하시다 하여 벌어진 일이었다. 나는 그렇다면 당연히 선물용 잣으로 구매하려 했는데, 신랑이 한사코 말려서 ‘실용적’인 어머님께는 낱개로 된거 3개 정도 사서 그냥 종이가방에 넣어 드리면 된다고 강하게 나를 설득하였고, 설득된 나는 일종의 도박하는 심정으로 그렇게 첫인사를 드렸다.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어머님께서는 그 잣 세 통에 너무나 기뻐하셨다. 마침 필요했던 것이라며, 어찌 알았느냐며 말이다.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또 한 번 놀랐다. 어머님의 눈에는 반짝이는 무언가가 맺혀 있었다.
선물용이 아닌 낱개로 쪼로록 들어 있는 잣 세 통을 보면서 어머님께서는 어떤 생각에 그리 눈물지으신 걸까. 의도치 않게 치열했던 어머님의 젊은 시절이 떠올라서였을까? 실용적인 것을 좋아하신다는 신랑의 강한 설득 때문에 택한 그 초라했던 선물이 어머님의 눈에는 넉넉지 않은 주머니 사정에 어떻게든 구색을 맞추려 애쓴 어여쁜 흔적으로 보아서 그랬던 것을 아닐까.
아무도 그때의 어머니의 심중은 모를 것이지만, 어쩐지 나는 그럴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냥 알 것만 같았다. 어머님의 눈을 들여다보니. 왠지 나는, 어머님과 사랑에 빠진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로 어머님과의 첫 만남은 인상 깊었었다.
나는 요리를 엄마에게서 배우지 않았다. 엄마도 엄마의 엄마로부터 배우지 않고 스스로 손맛을 만들어 오셨기 때문인지 요리를 가르쳐주려는 마음은 없으신 듯했다. 그런데 나는 엄마가 나에게 요리를 가르쳐주지 않는 진짜 이유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엄마의 엄마께서도 왜 가르쳐 주지 않았는지도.
결국 늘 그랬듯 나의 요리 전수자는 인터넷이다. 인터넷에는 없는 게 없다. 단배추 물김치를 검색하니 다양한 레시피들이 줄지어 떠오른다. 우선 단배추를 깨끗이 씻는다. 씻는 게 일이었다. 여러 번 씻었음에도 단배추의 솜털 같은 부분에서 작은 유충 알 같은 것을 발견한 나는 아예 한 장 한 장을 유심히 관찰하며 씻어낸다. 이 과정에서 벌써 나는 깨달았다. 음식은 가히 정성 그 자체라는 것을. 겨우겨우 씻어낸 단배추들을 켜켜이 소금을 얹어 세 시간 정도 절여둔다. 그사이 찹쌀 풀을 만들고 홍고추, 양파, 마늘, 사과를 넣고 갈아 만든 양념도 준비한다. 적당히 휘는 절여진 단배추의 탄성을 확인해보고는 그 위에 양념을 쏟아붓는다. 그리고 이틀간 실온에서의 숙성. 이때 중요한 것은 절대 뚜껑을 열면 안 된다. 궁금해도 꾸욱 참고 기다려야 한다. 잘 익을 때까지 말이다. 이때는 마치 내가 웅녀가 된 기분이다. 꾹 참고 인내하다 보면 어느새 이틀이 흘러가 있다. 뚜껑을 열어보니 시큼 달달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냄새만 맡아도 알 수 있었다.
성공이다!
시댁에 드릴 물김치 한 통을 담아 놓고, 다른 한 통에도 물김치를 담는다. 왠지 모르게 늘 죄송스런 마음이 드는 친정에도 한 통을 드릴 예정이다.
천성이 무뚝뚝하던 내가 어색한 미소에 고만고만한 맞장구로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처절하게 보이는 리액션으로 왠지 모르게 거리가 느껴지던 겉돌던 며느리라고만 생각하셨기 때문일까. 물김치 한 통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코로나 때문에 직접 드리진 못하고 마침 출장 가던 신랑 편으로 보내드렸는데, 신랑 말로는 완전히 극찬을 하셨다고 한다. 어머님께서는 본인이 만드신 것과 똑같다고 하시며 극찬하셨고, 웬만한 유명 음식점의 음식 앞에서도 좋은 말씀 듣기 힘드셨던 아버님께서도 맛있다고 하시며 남김없이 드셨다는 것이다. 다음날 어머님의 문자메시지를 보니 나는 더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제 보내준 물김치 맛있게 잘 담가졌어. 덕분에 가족들 당분간 잘 먹을 수 있어서 고맙구나. 아이 보면서 시간도 없을 텐데 만들어서 보내준 성의에 감동이구나. 한 주도 생기 넘치고 행복 가득하길 바란다.”
그리고 덧붙이신 한마디.
물김치 맛이 내가 담근 김치랑 똑같고
간도 잘 맞고... 100점이다.
당신이 담그신 김치맛과 같다는 것은 정말이지 어머님께 있어서는 극찬 중의 극찬이라 할 수 있었다. 치열한 삶 끝에 지금의 모든 것들을 일궈온 분들의 특징이 모든 정답이라든지 옳은 기준은 본인 뿐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계신데, 따라서 웬만해서는 본인만 한 사람은 잘 없다. 본인이 최고이기 때문이다.
그런 어머님께서 당신이 담근 것과 같다고 하시며 심지어 100점이라고까지 표현하셨던 것을 보면 물김치라는 음식이 주는 파급력은 어마어마하다.
시간이 좀 흐른 뒤 방문했던 친정에서도 반응이 가히 폭발적이었다. 아빠는 말없이 한 그릇 들이켜시더니 '아~ 크으~ 좋다!' 라며 나지막하게 탄성을 내지르셨고, 엄마는 ‘내가 너한테 김치를 얻어먹다니...’라며 약간은 충격받으신 눈치이지만 내심 좋아하시는게 눈에 보였다. 물김치 한 통이 무어라고 이렇게들 좋아하시는 걸까. 시댁에서나 친정에서나 별거 아닌 물김치 한 통에 너무나 좋아하시는 어른들 모습을 보니 기쁘다가도 어쩐지 슬퍼진다. 아니. 슬프다기보다는 뭐랄까 눈물겹다고 해야 할까.
가족이 다른 말로 식구라고도 하지 않는가. 생각해보면 두런두런 밥상에 둘러앉아 함께 식사한다는 것은, 식사하는 시간을 밥상을 공유한다는 것은 기본적인 욕구 충족인 동시에 생존을 공유하는 중요 순간이기도 한 듯하다. 뒤늦게 나는 어렵게만 느껴지던 효도 방법을 찾았다. 그리고 그 효도 방법은 가장 효과적이고 원초적이기도 했다. 내가 만든 물김치로 시댁과 친정, 그리고 우리 집 밥상이 이어지는 듯하다.
얼마전 두 번째로 담근 물김치는 열무물김치였다. 이번에는 다른 레시피로 만들어보았다. 멸치 다시마 육수를 내어 만든 열무물김치는 이번에도 어머님의 극찬을 이끌어낼 수 있었는데, 멸치 다시마 육수 때문일까? 특이하게도 어머님께서는 이번 열무 물김치가 어머님의 외할머니께서 생전 해주시던 물김치 맛이라고 하셨다. 어머님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물김치를 어머님의 며느리가 재현해 낸 셈이다. 음식은 이렇듯 어떤 한 기억을 어떤 한 사람을 소생시켜주기도 한다.
물김치 익어가듯 철없는 딸 그리고 어딘지 겉돌던 며느리도 함께 익어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