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ynn Jun 15. 2024

어머니

거창 소녀의 충청도 정착기

사실 내가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던 시절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아주 어린 시절 기억이기에 떠오르지 않을 수도 있지만

기억 속에는 증조할머니와 삼촌들의 기억은

흐릿하지만 상당히 많이 남아있다.


아마도 그 시기에 우리 부모님은

가족들을 위해 정말 열심히 일만 하셨던 듯하다.


특히, 어머니의 고생은 상상은 초월했다.

6형제 중 셋째 며느리로 집안에 들어왔지만,

첫째와 둘째 큰아버지가 분가하면서

어머니는 거의 맏며느리와 같은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다.


증조할머니부터 할아버지, 할머니,

내 철없는 삼촌들까지의 온 가족의 빨래는 물론,

삼시세끼 대가족을 위한 밥하고 설거지 하고,
그리고 어린 나와 동생을 키우기까지

집안일은 정말 극한 직업이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가끔 달프던 시절

빨래터에 있었던 얘기를 해주셨는다.

인근의 천안 북일고 야구부원들이 연습을 마치고 자주 빨래하러 왔다고 한다.

빨래하는 것이 서툴러서 대신 빨래도 해주셨는데

그때 만난 선수들 중에 기억 남는 게 이상군 투수(전직 감독)였다고 했다.

지금세탁기와 건조기가 있어서

빨래를 하는 것이 큰일이 아니지만

1980년 즈음에는 며느리들의 최고 부담이 바로 빨래였다고 했다.


이렇게 집안일이 많아지면서 결국 직장을 그만두셨다.

처음에는 아버지와 함께 작은 도자기 공장을 함께 다녔는데,

나와 동생을 낳고 결국에는 퇴사를 하셨다.


사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 공장에서 만난 커플이었다.

우연히 만난 자리에서 두 분은 눈이 맞았고
나란 존재가 생겨나면서

결혼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이것이 어머니의 만만치 않은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었다.


어머니는 경상도 거창의 산골 마을에서 태어나셨다.

거창의 시골 소녀 어머니는 4남매 중에서 둘째로,
큰 오빠와 두 여동생이 있었다.

지금 나에는 외삼촌과 두 명의 이모들이다.


외가 살림도 넉넉하지 않았기에
어머니는 중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갔다.

가족을 위해 돈을 벌기 위한 것이었다.

서울의 먼 친척집에서 머물며

 10대 반부터 돈을 벌었다.

여동생들을 위해서 열심히 공장을 다니신 어머니는

20대 중분에 천안으로 내려와서 도자기 공장에 취업을 했다고 했다.

그리고 천안 토박이인 아버지를 만나서

가정을 꾸렸 우리 가족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어머니는 그때부터 우리 가족을 위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일하셨다.

아버지 또한 성실히 묵묵히 가장의 역할을 하셨다.

한 가지 단점이라면 술을 너무 좋아하셨다는 것.

때문에 결혼 초기부터 술로 인한 갈등은

수십 년 동안 끊임없이 이어졌고

어머니의 결혼 생활결코 만만치가 않았다.


그런 환경 속에서 나란 존재의

삶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전 04화 바나나 먹고 싶어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