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버지는 초등학교 중퇴였다.
1948년생. 6.25 전쟁이 끝나고 1955년 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기성회비(육성회비)라는 수업료를 내지 못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선생님께 학비 가져오라며 크게 혼이 났고 학교에서 쫓겨났다고 했다. 6형제 모두를 가르치기에 넉넉한 환경이 아니었기에 할아버지는 셋째인 아버지에게 월사금을 주지 못했다. 아버지에게 학교를 다니지 말고 집 안의 농사일을 도우라고 했다.
아버지는 분명 고민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여렸던 나의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말을 그대로 따르기로 했다. 그 이후로 학교에 가지 않았다. 10살 어린 나이부터 아버지는 농사를 시작했다. 집 안의 농사를 할아버지, 할머니를 도와서 시작했고, 가축을 키우고 산에 가서 장작으로 쓸 나무를 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거의 집안일을 도맡아 하면서 10대를 보낸 것이었다. 덕분에 큰 아버지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고, 동생들도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20살 때 바로 입대를 했다. 학력이 높지 않아서 입대가 안될 줄 알았지만, 그런 백(?)도 없었던 듯했다. 놀랍게도 초등 중퇴의 학력에도 군대는 가야만 했다. 아버지가 근무한 곳은 철원의 중부 전선 최전방. 어둠의 자식들이 군복무하는 그런 최악의 근무지였다. 거기서 3년이 넘도록 생고생을 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학력 때문에 아버지는 병장이 아닌 상병으로 군생활을 마무리해야만 했다. 그때부터 학력의 벽이 높았다고 가끔 아버지는 하소연하듯 내게 이야기를 하셨다.
군대를 제대하고 아버지는 수도권 여기저기를 돌며 일자리를 찾았다. 그렇지만 그 또한 쉽지 않았다. 결국 천안으로 돌아와서 집 근처의 영흥 도자기라는 작은 공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우리 어머니를 만나서 결혼을 하게 된 것이었다.
어머니와 결혼하고, 아들인 나를 비롯하여 두 명의 딸을 낳으면서 아버지는 진정한 가장이 되었다. 경제적으로 우리 가족과 할아버지, 할머니를 부양해야만 했다. 하지만 초등학교 중퇴의 학력으로 좋은 직장에 취업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대부분 모두가 꺼려하는 고된 업무였고, 정규직으로 일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취업을 한다고 해도 회사들은 대부분 부실한 기업들이었고 망하기를 반복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어린 시절 아버지는 자주 공장을 옮겼다. 일이 고되고 급여도 높지 않았지만, 일할만하면 회사가 어려워져서 오래 다니기 쉽지 않았다. 도자기 공장부터 철강 공장, 조선 용접 회사 등 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일을 찾고 또 찾았다. 하지만 언제나 현실의 벽에서 부딪칠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 관리자들의 무시와 멸시가 이어졌고, 지금의 불법 취업한 외국인 노동자 이상으로 일을 시켰다고 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어린 시절 아버지는 술을 마시는 횟수가 많아졌고 자주 술에 취해서 들어왔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와의 갈등은 계속 이어졌다. 고단함을 달래기 위해 외상으로 술을 마시다 보니 급여일에는 그 돈을 갚고 남은 돈이 거의 없을 때고 있었다. 집 안에서는 고성이 이어졌다. 어머니와의 갈등은 이어졌고, 일주일 내내 그러는 날이 있기도 했다. 나와 동생들은 이불속에서 흐느껴 울며 매일매일 그 소리를 들어야 했다. 결코 우리 가족들에게는 쉽지 않은 순간이었다.
아버지가 일자리를 구하고 그만 두기를 반복하면서 어머니도 다시 일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경제적으로 너무나 힘들었기에 어머니가 돈을 벌지 못하면 돈을 모을 수 없는 그런 환경이었다.
7살 때부터 아버지와 어머니는 공장을 향해 아침 일찍 집을 나섰고, 야근이 이어질 때면 밤 10시가 넘어서 들어오셨다. 주말 출근이 있을 때는 아버지와 어머니 얼굴 보기도 쉽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