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에서의 첫 번째 일정을 마무리하고 피렌체로 떠나는 날이다. 오늘도 역시 아침 일찍 눈이 번쩍. 잠에서 깨어난 현지 시각은 새벽 5시이지만 사실 한국 시각은 오전 11시. 우리 가족 모두 함께 산뜻하게 아침 산책을 하기로 하고 해가 뜨자마자 호텔 문을 나섰다. 관광객들로 가득한 어제 오후의 도심 거리와 다르게 평화로운 로마의 아침. 한적한 로마 시내 한복판을 조용히 손잡고 거니는 느낌이 너무 좋았다. 고대의 마차거리를 우리 가족만이 오롯이 누리는 기분이랄까? 하지만 아쉽게도 후텁지근한 여름의 기운은 아침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아침 기온이 거의 25도. 오늘따라 바람도 없었기에 조금만 걸어도 땀이 흘렀다. 지독한 로마의 더운 여름은 3일 동안 아침부터 저녁까지 우리를 졸졸 따라다녔다.
우리 가족은 퀴리날레 궁전을 지나서 트레비 분수를 찾았다. 로마에 찾으면 꼭 들려야 하는 곳이고, 도보 여행을 하다 보면 항상 지나는 곳이 바로 이 분수다. 숙소에서 걸어서 15분이면 도착하는 가까운 장소였기에 산책 장소로 트레비 분수를 택했다. 6시 30분쯤 트레비 분수에 도착해서 한적한 여유를 즐겨볼까 했던 우리 가족. 그런데 도착하자마자 "헉"이라는 놀람. 아침 이른 시간이었지만 이미 앉을 장소가 없을 정도로 분수 주변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여행객 모두가 이렇게 부지런하다니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분수에서 시원하게 떨어지는 물줄기 때문인가? 트레비 분수 주변에서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사람들 틈으로 들어가서 휴대폰으로 사진 몇 장을 남겼다. 우리가 사진을 찍으니 여기저기 사진 요청을 해서 이른 아침부터 사진사 역할을 제대로 했다. 10분 정도 분수 앞에 머물다가 다시 숙소로 향했다. 그리고 오는 길에 만난 콰트로 폰타나 분수. 정말 우연히 작은 교차로에서 발견한 곳인데 16세기말에 건설된 것으로 도메니코 폰타나 학교의 건축가들이 만든 작품으로, 과거에는 인근 주민들의 식수로 활용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번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로마는 수도 시설이 잘 갖춰져 있었고, 지금도 어디에서나 쉽게 물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런 장점이 1000년 넘게 이어온 제국의 수도 '로마'를 만든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봤다.
아침식사를 하고 오전에는 숙소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짐정리를 했다. 11시 30분쯤에 짐을 가지고 떼르미니역으로 이동. 호텔 직원들이 해주는 마지막 인사를 받으며 나와 아내, 아들은 각각 캐리어 하나씩 끌며 테르미니역으로 걸어갔다. 살짝 10여분 걸어가는데 뜨거운 햇살에 얼굴이 화끈화끈. 정말로 더운 날씨였다. 역에 도착하여 티켓을 바꾸고 잠시 2층으로 올라가서 점심을 먹었다. 며칠 동안 파스타와 피자만 먹은 듯하여 오늘은 오랜만에 동양식. 일본 초밥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점심을 먹은 후에 홀로 역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사진을 찍는데 내 주머니에서 동전 지갑이 떨어진 듯했다. 누군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 돌아보니 이태리의 착하게 생긴 아주머니였다. 내게 동전 지갑을 건네주시는 것이 아닌가? 떨어진 것도 몰랐는데. 그분 덕분에 지갑을 다시 찾게 되었다. 너무나 고마웠다. 큰돈이 들어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소매치기가 많다는 로마 중앙역에서 지갑을 찾아주는 분이 있다니 이탈리아에 대한 좋은 추억이 하나 생긴 듯했다.
이런 에피소드를 뒤로 하고 우리 가족은 12시 55분 피렌체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우리나라의 고속열차와 비슷한 분위기에 italo 열차를 타고 피렌체로 향하는 길. 도착 시각은 오후 2시 35분으로 1시간 40분이면 피렌체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열심히 밖에 풍경을 살피니 노랗게 핀 해바라기 밭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넓은 해바라기 밭은 이태리에서 처음 보는 듯했다. 풍경에 취해 있는 도중에 갑자기 기차 속도가 시속 250km에서 30km 정도로 서서히 느려지기 시작했다. 나는 날씨가 너무 더워서 철로 문제로 서행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10분 지연, 20분 지연, 30분 지연된다는 이야기가 나오더니 갑자기 중간 간이역에서 정차를 했다. 뭔가 문제가 있는 듯했다. 아마도 철로 문제가 아닌 열차 자체의 문제인 듯했다. 30분 정도 정차하다가 고속열차는 다시 천천히 이동을 했다. 고속이 아닌 저속 열차로. 결국 기차는 피렌체에 2시간 10분이 연착한 오후 4시 45분에 도착을 했다.
사실 이날 우리는 아카데미아 미술관 예약이 잡혀있었다. 일반 티켓을 구하지 못해서 로마에 도착하여 대행사를 통해서 조금 비싼 티켓을 예매해 놓은 상태였다. 정확히 17시에 대기 없이 바로 들어갈 수 있는 티켓을 구매했기에 기차가 연착되는 동안 조마조마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10여분이 남아서 우리는 기차역에 18유로를 내고 짐을 맡긴 후에 다비드상이 있는 아카데미아 미술관을 택시를 타고 향했다.
정말 천만다행이었다. 미술관 도착 시각은 오후 5시 5분. 대행사 담당자를 찾아서 티켓을 수령할 수 있었다.
입장 마감 시간이 오후 6시였기에 조금만 늦었으면 10여만 원이 넘는 티켓도 날리고, 미술관도 볼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불행 중 다행이었다.
보안 검색을 마치고 미술관으로 들어갔다. 멋진 조각과 미술 작품들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이 미술관은 1882년에 만들어진 미술관으로 르네상스 시대의 조각과 회화 등을 전시에 놓은 곳이다. 1층에서는 종교적 색채가 짙은 회화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그 옆 쪽 방에는 미켈란젤로의 조각상들이 여러 개 전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 우리가 고대하고 고대하던 다비스 상이 눈앞에 나타났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이탈리아의 예술가 미켈란젤로로 조각한 대리석상 다비드다. 미켈란젤로가 1501년부터 1504년 사이에 조각한 것으로 그 높이가 5.17m. 이스라엘의 왕 다윗의 청년 시절 모습을 예술적으로 표현한 세계 최고의 조각상이다.
가까이 그 앞으로 다가갔다. 그 웅장함이 나를 압도했다. 교과서 속에서만 보던 작품을 직접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너무나 행복했다. 조각상 주위에는 많은 이들이 있었지만 그 틈을 뚫고 조각상을 한 바퀴 돌면서 살폈다. 그리고 조용히 관람석에 앉아서 10여분을 지켜봤다. 인간이 조각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정교했고, 조각으로 하나의 거대한 인간이 다시 태어난 것처럼 보였다. 힘줄하나하나가 살아있는 인간의 모습 그대로였다. 너무나 완벽했다. 다비드상을 가만히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탈리아에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비드 상을 둘러보고 다시 주변의 회화와 조각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회화 속에서는 고대부터 중세, 르네상스로 이어지는 과거의 역사가 그대로 담겨 있었다. 수백 년 전에 남겨졌던 그림 속에서 아주 오래전 유럽의 역사를 볼 수 있었다. 여러 조각을 둘러본 후에 아카데미아 미술관을 나서면서 미켈란젤로의 한 마디가 떠올랐다. "나는 조각을 할 때 그 속에 있는 인물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그 말속에 진정한 창조자의 모든 것이 담겨있었다. 오늘 하루 미켈란젤로와 다비드상을 만날 수 있었던 일생일대 최고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