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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음으로 쑨 묵을 불안 소스에 찍어 드세요

by 하다 Mar 30. 2025


대충 세어도 20년이다. 10대의 마지막 해에 자가면역 질환 판정을 받고 난치병 환자로 지낸 기간 말이다. 잊을만 하면 수술도 해가며 아주 알차게 꾸준히 나빠졌다. 그래서 생의 마지막이 다른 이들보다 빠르리라 짐작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나마도 남의 속도로 살다가는 내 명대로 못 살 것 같아 직장을 그만두고 책방을 열었다. 살아온 관성으로 인해 결국 빠르게 스스로를 소진하는 날도 있지만 다행히 대부분은 느린 공기 속에 머물 수 있었다. 무해한 사람들과 만들어 가는 추억들도 만족스러웠다. 퇴직금이 야금야금 줄고 있었지만 걱정되지도 않았다. 몇년만 지낼 수 있으면 될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작년 겨울, 책방 근처에 작은 한의원이 생겼다. 카페를 하던 자리에 생긴 정원이 예쁜 그 한의원을 보며 며칠을 망설이다 발을 들여 놓았다. 치료에 대한 기대보다는 오로지 호기심 때문이었다. 기대와 실망을 늘 한 묶음으로 겪었기에 오래전 기대라는 것을 버렸다. 그래서 그저 가벼운 마음이었는데 전혀 가볍지 않은 선생님을 만났다. 내 병을 나보다 더 진지하게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한번 더 기대어 보기로 했다. 문제는 진료 시간이었다. 책방과 한의원의 진료시간이 똑같아 누군가는 양보를 해야하는데 그 누군가는 누가봐도 나였으니 자연스럽게 책방의 영업시간이 바뀌었다. 그렇게 매일 침을 맞고 한약을 먹으며 겨울을 나고, 봄을 맞이 했다. 겨울이면 떨어져 나갈 듯이 아프던 손발이 그저 조금 시린 정도로 바뀌었고, 주기적으로 구토를 유발하며 찾아오던 두통도 횟수가 줄어들었다. 소화가 편해졌고, 배변도 잠도 수월해 졌다. 선생님이 말했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면 몸은 알아서 회복해요. 그래서 나의 치료는 언제나 얼마나 잤는지, 소화는 잘 되었는지, 배변 상태는 괜찮은지 체크 하는 것으로 시작했고, 그것들을 조금 더 나아지게 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밤에도 늘 얕은 긴장 상태로 유지되는 병원 생활을 오래한 탓에 통잠을 자지 못했으나 요즘은 아침까지 곧잘 자고, 좀처럼 먹은 걸 흡수하지 못해 그대로 내보내던 장도 어느 정도 편안해졌다. 자연스럽게 체력이 좋아졌다.


이쯤 되면 마냥 기뻐해야 할 것 같은데, 기분이 이상했다. 20년을 내리 나빠지다 어느 순간 소강 상태가 되더니 조금씩 좋아지는 이 느낌이 너무 낯설었다. 하루 끝의 나는 꽉 쥐어 짠 빨래처럼 남은 에너지가 하나도 없어야 하고, 다음 날의 나는 그 소진된 에너지를 반도 채우지 못한 채 다시 하루를 시작해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하루가 끝나도 무언가가 몸에 남아 있고, 다음 날도 남아 있는 그 무언가와 함께 시작했다. 이 이상하고 낯선 감각을 어찌하지 못해 한동안을 둥둥 뜬 것 같은 상태로 지냈다. 좀처럼 일들이 손에 잡히지 않아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 된 것인지 마음을 촘촘히 들여다 보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불안함이 이 회복의 시간들을 휘감고 있었다. 짧은 통증과 불편함이었다면 당연히 그 회복을 마음껏 즐기고 행복했을 것이다. 그런데 긴 병을 겪어오며 그 통증과 불편함에 익숙해져 있던 몸은 이 낯설음이 영 불안한 모양이었다. 마치 오랜 기간 누군가의 폭력에 노출된 이가 그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아프고 괴로워도 익숙한 것을 벗어나는 일은 말처럼 쉽지가 않다. 몸도 마음도 예상이 가능한 범위 안에 머무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하니까. 살기 위해 안전을 추구하는 인간 본성의 부작용이다. 어쩌겠는가. 나도 물리적인 몸과 그 몸에 실린 마음을 가진 인간인 것을.


비록 아직은 이 낯설음이 너무 탱글탱글해 젓가락으로 집기 어렵고, 불안이라는 양념 없이 맛보기도 쉽지가 않지만, 익숙해지면, 좀더 자주 맛을 보면 양념 없이 순정으로 그 맛을 음미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아직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때까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예전의 그 통증과 불편함을 이제는 벗어나도 괜찮다고 스스로 주문을 외우는  일 뿐이다. 그리고 덤으로 이제는 노후도 좀 걱정해야 하고. 오늘도 자기 전에 주문을 외워본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아져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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