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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삼 Dec 16. 2021

책 앞에 선 자는 아무것도 모른다.

한 글자 에세이 - 책(冊)

나는 효율적이고 실용적이며 범용적인 것에 커다란 애정이 있는 사람이다. 경제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폴리에스터 재질의 장바구니는 이따금 1인용 돗자리로 변신해 산책 친구가 되기도 하고 버리기 직전의 면 나시는 낯익고도 새로운 방석 커버가 된다. 심지어 어릴 때 봤던 '짱구는 못 말려'에서 인상에 남았던 장면이 봉미선 씨가 잼 뚜껑이 열리지 않자 뜨거운 물에 잠깐 넣었다가 빼니 손쉽게 열리던 장면이었다. '아따맘마'는 생활 꿀팁의 보고 같은 애니메이션이다.


내 삶에서 비효율적이고 이상적이며 일용적인 행위는 많이 하고 있지 않다고 오만을 부렸다. 일상의 한 부분을 야금야금 먹히다 되려 깔끔히 덜어낸 시간의 조각을 갖다 받치고 있는 주제에. 건방진 사고 앞으로 차곡히 정렬된 책들이 심상한 기세로 나를 쏘아보는 것만 같다. 독서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비효율적이고 이상적이며 일용적인 행위이지 않을까.


두 손은 책을 펼쳐 쥐고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읽어내 버리기’ 하지 않으면 어떤 책도 소화되지 않는다. 어떠한 작동도 나의 몸이 감각하지 않으면 모든 읽기는 불가능하다. 세상을 다 잃은 눈을 하고 있어도 영상은 보여버리고 오늘 먹을 저녁을 생각하고 있어도 세상은 들려져 버린다. 생각의 방에 문을 닫아봤자 벌컥벌컥 열고 들어오는 통에 시험기간에 책상에 앉은 청소년 마냥 '문 닫고 가!'를 외치는 거다. 물론 매 번 문은 내가 닫으러 가야 한다.


해리포터의 마법 세계만큼은 아니어도 이제 일상에서 돼버리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세탁과 건조가 돼버리고 설거지가 돼버리고 옷의 세균마저 없어져버린다. 살아져 버리는 인간과 살아내는 인간은 무엇이든 다르다. 포기한 삶과 해탈한 삶의 사이에는 이해가 있다.


책에는 나 빼고 모든 것이 있는 것 같지만 책에는 오직 나만 있다. 남은 것은 나뿐이다. 


문을 닫으러 가는 와중에 책이라는 여권을 챙긴다. 여권의 색상에 제한이 없다. 심지어 백신 접종 여부도 묻지 않는다. 책을 펼치는 순간, 공항에 도착하는 것은 물론이고 출국 수속과 이륙까지 완벽하게 진행된다. 기내 안내방송을 귀 기울이듯 목차와 서문을 읽어나가면 어느덧 안정적인 비행항로에 스며들어 도착지를 향해 나아간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비행이 한창인 와중에 끼니가 고팠을 때 요청할 사람이 없다는 거다. ‘물은 셀프입니다.’ 김밥천국에 온 것처럼 손수 공급하지 않으면 고달픈 비행을 계속해야 한다. 나는 직행하는 독서의 비행을 경험해본 적이 없다. 매번 갈아탔다가 아주 급하게 착륙하고선 악당에게 좇기는 주인공처럼 급하게 책갈피를 빼어 들고 비행기를 이륙시킨다.


아무튼간에 책이 효율적이라느니 실용적이라느니 하는 사람을 보면 멀리해야 한다. 농담이다. 하지만 3분 조리 밀키트가 30분 요리의 미각을 이기는 현대 사회에서 어떻게 책이 실용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몸에서 빼어져 나오는 독서를 함께 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당신과 내가 한 권의 책 모퉁이를 부여잡고 같은 페이지를 읽어봤자 동일한 활자를 읽어 내려가지 못한다. 드물게 같은 책을 읽어낸 사람과 함께 이야기를 할 때면 중고서점에서 절판된 책을 발견한 것만큼 환희에 차지만 이걸 읽을 시간에 오징어 게임을 봤으면 지나가는 사람만 붙잡아도 별안간 벅차오른 사람이 될 수 있었을 거다.


진정으로 소유할 수 있는건 생각밖에 없다. 육신과 자본주의의 모든 것은 쓰레기다. 


효율적이고 실용적이며 범용적인 구석 하나 없는 책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는다. 고착된 활자 하나하나, 월세 정도는 내줬으면 좋겠는 책장 구석 한 권 한 권, 차마 냄비 받침으로는 못 쓰겠고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공간의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굵은 양장본 도서까지.


어릴 때는 책에 별다른 흥미를 가지지 못하고 그나마 읽는 책들 마저도 편식했다. 그중에서도 노빈손 시리즈와 살아남기 시리즈를 가장 좋아했는데 어린 나이에 뭘 그렇게 삶의 대한 애정이 강했는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나는 살아내고 싶다.


성인이 된 후 ‘이제 책을 좀 읽어보자.’ 다짐하며 도서관을 찾았던 날 바다 위에 떠도는 부표는 고사하고 갈매기가 떨어트린 새우깡이 된 것만 같다. 추천 도서 혹은 이 달의 선정 도서 타이틀이 걸린 걸 빌리면 될까. 뭔지는 몰라도 유명한 고전문학을 읽어야 할까. 그것도 아니면 노후를 위해 경제학 도서를 탐구해야 할지 고민하다 눅눅해진 새우깡은 바다의 심연으로 가라앉는다. 차라리 갈매기에게 낚이고 싶은 새우깡이다.


장르와 글에 취향이 생기고 좋아하는 작가와 출판사의 이름을 외우고 다니는 순간이 온다. 무량한 바다 위에서 읽을거리를 낚아채는 재미와 함께 몰아치는 신간의 파도에 뒹굴고 다니는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는 내가 책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책이 나를 선택하는 것만 같다. 유튜브 라이브 재즈 음악 소리가 울려 퍼지는 도서관을 들어서며, 발걸음이 인문학과 어문학 문학 코너에 또는 자연과학 코너 사이에 어느 책장 앞에 서있는지에 따라 나의 관심과 사랑이 어디에 집중되어 있는지 관철된다. A 도서를 빌리러 왔다가 도리어 A 옆에 있는 D에게 온 마음을 내어버리고서 봇짐꾼을 자처한다. 바다에 몸을 맡긴 채 동그랗게 몸을 말고 맹하니 떠다니는 갈매기처럼 책이 흐르는 대로 넘실거리다 다시 높이 날아 세상을 바라본다.


일본의 다실 입구入り口처럼 책 앞에는 모두가 평등하다. 빈한 자의 고개를 들게 하고 부한 자의 허리를 굽히며 어리석은 자와 총명한 자의 무릎을 굽히고 호기심의 손 끝을 부른다. 책 앞에 선자는 언제나 아무것도 모른다. 무엇이든 알 수 없지만 무엇이 아닌지는 알고 싶으며, 가능한 것을 계획하고 불가능한 것을 지우고서 다시 가능성의 갈피를 잡기 위해 책을 펼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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