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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연 Jun 18. 2023

[여행 전] 여행에 대한 영감의 원천은

나를 상상하게 한 그녀들

큰 아이를 낳고 조리원에서 막 집으로 돌아왔을 때 엄청난 폭염이 시작되었다. 초보엄마가 갓난아이와 둘이 집에서 복작대며 생활하던 그때, 내 방 내 침대는 모두 사치였고 아이 이불 옆에 내 이부자리를 깔고 함께 거실 바닥 생활을 했었더랬다. 겨우 갓난아이 한 명뿐이었지만, 아이 낳기 이전의 모든 나의 생활은 전면 중단되었고, 초보엄마들이 으레 그렇듯이 아이는 일찌감치 손을 타서 나와 한 몸처럼 지내고 있었을 때였다. 유일한 짬은 아이가 잠들었을 때뿐이었는데, 우리 큰 아이는 낮잠 시간이 정확히 30분이었다. 신생아 시절에는 좀 더 길게 자주면 좋으련만, 그때는 딱 30분이면 정확하게 울며 기상을 했다.

 아이가 잠들면 하고 싶은 게 많았지만, 육아에 지쳐 아이와 함께 잠들기가 일쑤였고, 때때로는 밥을 먹거나 화장실을 가는 등의 기본적인 욕구를 해결하기에도 바빴다. 그래도 가끔은 아이가 잠들면 그 옆에 내 이부자리에 엎드려 아이의 숨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기도 했다. 그때 읽었던 책은 ‘한비야’ 작가의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 세트였다. 아이를 낳기 전 직장 동료로부터 선물 받았던 책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읽지 않다가 아이가 잠들면 읽고 싶어 져 야금야금 조금씩 읽었던 것이다. 그 당시 나는 집 앞 슈퍼도 맘 편히 나가지 못하던 육아에 메인 몸이었는데, 전 세계 오지를 여자의 몸으로 씩씩하게 탐험한 여자의 에세이를 읽고 있었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지만, 나와는 다른 삶을 사는 그녀의 삶을 부러워도 대단해하기도 하며 또 나 역시 약간은 꿈꾸기도 했었던 듯했다. 아이가 없었다 해도, 결혼하지 않았다 해도 선택하지 않았을 것 같은 그 여행지들을 다니며 사람들을 만나고 인생의 발자국을 남기는 그녀의 모습은 나에게 새로운 간접 경험이었고, 여행이라는 세상의 영감을 던져주었다.


나는 사실 A형에 겁이 많은 성격이고 MBTI 역시 I형인 인간으로 결혼 전에도 그다지 여행을 좋아하거나 즐기지 않았었다. 이런 나를 닮았는지 큰아이도 조금만 환경이 변하고 조금만 새로운 소리가 들려도 낯을 가리고 울어대기 일쑤여서 더더욱 밖으로의 외출을 줄이고 또 줄였다. 조용한 집에서 엄마와 주로 둘이 지내는 예민한 아들. 내가 더 예민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남들은 아이를 안고 유모차에 태우고 마트도 여행도 잘 다니던데 내 아들은 왜 이리도 소리에 예민한 건지 원망도 한숨도 나왔다. 그래도 아이에게 새로운 안전한 환경을 계속 접하고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한 우리 부부는 나가면 고생길이었지만 조금씩 반경을 넓혀 나들이도 나가고 여행도 가보고 하며 아이의 세상을 확장시켜주려 했다. 그래봤자 고작 내가 사는 지역 내이거나 한 시간 이내의 나들이 장소였지만 말이다.


 처음 아이를 키우는 많은 부모가 그랬겠지만, 나 역시 도대체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뭘 잘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늘 확신이 없었고 그럴 때마다 각종 육아서들을 섭렵하며 육아를 책으로 단련시켜 나가던 그때, 우연히 오소희 작가의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겠지!’를 읽게 되었다. 아이와 함께 베트남과 캄보디아 등지로 배낭여행을 다니던 오소희작가가 아이와 단 둘이 터키를 다녀온 여행을 기록한 여행기였다. 그동안의 어떤 육아서도 나에게 가르침만 주었지 이렇다 할 감동을 주지는 못했는데 아이와 함께 하는 여행을 기록한 여행기를 읽으며 아이와 함께하는 인생 여정이 새롭게 다가옴을 느꼈다. 그 책 이후에 아이와 산책을 나가도 조그마한 자극에 울거나 웃는 아이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나 혼자였으면 발견하지 못했던 순간들의 발자취를 내 안에 새기며 내 일상을 풍요롭게 채우는 시간을 만나게 되었다.


나는 일 년에 두 번 비교적 길게 휴가를 쓸 수 있는 직업을 가지고 있고 아이들의 육아를 부탁할 수 있는 친정 부모님도 곁에 계셔 여행을 떠나려고 한다면 아이 없는 여행도 가능한 편이지만, 이상하게도 아이들을 맡기고 떠나는 여행이 완전히 행복하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생각해 보면, 내가 진짜로 행복했던 여행들은 모두 아이들과 함께 떠났던 여행이었는데, 그것은 아이들이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풍경을 눈에 담게 해 주고, 또 그 시간들을 내게 새겨주었기 때문이다. 아이들과 내리쬐는 뙤약볕에 무려 8시간이나 머물렀던 함덕의 해수욕장, 제주 맛집을 검색하고 또 검색하고 내려왔는데, 허기에 지쳐 급하게 편의점에서 삼각김밥과 커피를 마시며 바라본 그 바다와 하늘이 너무도 아름다워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었다. 질리지도 않고 부르는 똑같은 동요를 들으며 따라 부르던 아이들이 마침내 뒷자리에서 잠이 든 것 같아 플레이 리스트를 바꾸면 바로 잠이 깨, 어쩔 수 없이 동요 bgm을 들으며 떠났던 강원도의 터널 많던 고속도로. 식당에 있는 작은 강아지를 보느라 행복해하던 아이들의 웃음과 애들의 발걸음을 잡았던 그래서 십 분 거리의 길도 한 시간씩 걸리게 만들었던 길가의 풀들과 꽃들 그리고 벌레들. 이렇게 집순이인 나에게 행복한 여행은 이렇게 아이들과의 시간으로 풍요롭게 채워졌다. 그리고 그 순간들은 우리 부부에게 육아에 대한 확신을 찾지 않아도 되는 완벽하게 행복을 느꼈던 시간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이제는 더 이상 뒷좌석에서 노래를 합창하지 않으며, 재잘재잘 이야기를 떠들지도 않고, 아름다운 풍경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는, 어른으로 성장하는 길에 들어섰다. 그래서 사실, 이번 여행은 과연 어디로 흘러가게 될지 모르겠다. 그래도, 한비야 작가처럼 하루에 몇 만보씩 걸어서, 두려운 광경도 이겨내며, 씩씩하게 다니다 보면,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줄 거라고 믿는다. 겁이 많고 끊임없이 확신을 찾으며 여행을 준비하는 나에게 오소희 작가의 남미 여행 에세이 책 제목이 힘이 된다. ‘그러므로 떠남은 언제나 옳다.’ 그러니까, 우리도. 언제나처럼 함께, 좋은 시간을 새겨올 거라고.

아름다운 꽃길도 무심히 걷는 아들들
서울 나들이 중 명동교자에서 나온 후식을 나눠먹던 우리 넷. 함께 잘해보자고!


@대문 사진은 전남지역 여행 중 전남과학대학교 벽면의 각 나라의 사랑해라는 말이 써져 있던 벽면. 우리가 갈 길의 모습이 떠올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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