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웃사이더(Outsider)’. 소위 ‘아싸’라는 말로 줄여서 참으로 쉽게도 쓰는 말이다. 어떤 모임에서 주도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을 곧잘 일컫지만, 사실 그 시작은 그런 가벼운 뜻이 아니었으리라. 그 시작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조금 더 줄여서 말하자면 ‘소외된 자’ 정도라고 할 것이다.
타인의 무리에서 한 발 물러선 자들. 소외된 자들 중 그러한 삶의 모습을 진정으로 원한 사람은 얼마나 될까. ‘자발적 아웃사이더’라고 장난스럽게 말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타인과 연결되고자 하는 욕구를 완전히 저버린 채 살아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누구나 마음을 터 놓을 친구 한 명쯤은 있기를 바랄 것이다.
「나의 루마니아 어 수업」에 등장하는 ‘김은영’도 그랬을 것이다. 말하자면 지독하게 외로운 사람. 우리는 흔히 타인과 섞이지 않는 이들을 보고, 쉬이 문을 열어주지 않는 저만의 세계가 있을 것이라 지레짐작한다. 물론 그런 사람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이 작품에서 읽어냈던 은영이라는 인물의 행간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섞이지 않은 게 아니라 섞이지 못한 것이다. 자기만의 세상이 있는 게 아니라 외로움에 갇혀 제 세상을 잃어버린 사람. ‘배고파요’라는 가장 사소하고 본능적인 말조차도 아주 조그마한 크기로, 거기에 수줍음까지 묻혀내지 않으면 말을 꺼낼 수조차 없는 사람. 서술자는 그를 ‘가을의 눈동자’라고 표현했다. 떨어지는 낙엽에 쓸쓸함이 묻어나오는 그런 계절의 눈동자를 한 채로, 은영은 고독 그 자체의 삶을 살았다. 마치 손이라도 대면 금방 바스러질 듯한 가루 같은 그런 사람이었을 듯하다.
아무도 다가가지 않고,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은영에게 다가온 게 서술자였다. 누군가의 닫힌 마음을 열고 어루만지기 위해 한 걸음 다가가는 그림이야 사실 흔한 케이스이다. 그러나 그 방법이 손수 소설을 번역해오는 일이라니. 정성스럽고 조심스럽다. 단어 하나하나, 글자 하나하나에 소담하게, 그러나 꾹꾹 눌러 담아냈을 그 마음이 갸륵하다. 외로움에 갇힌 이의 팔목을 잡고 끌어내는 게 아니라, 손을 내민 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나’가 은영에게 선물했던 선물은 도리넬 체보타루라는 작가의 소설이었다. 한국에서는 소개조차 되지 않았고, 현지에서도 그리 알려지지 않은 작가. 서술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누구도 발견하지 않으려는 작가”이다. 독자와의 긴밀한 소통을 업으로 하는 작가임에도 외려 독자로부터 소외되었던 작가의 소설을 그 둘이 함께 읽어나갔다. 위로하고 위로받고, 함께 세계를 공유하는 그 감격적인 순간의 교량을 놓은 것이 소외된 작가라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마치 그들이 수업이 과정만큼 행복하게 끝맺지는 못하였음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느 날 갑자기 은영은 학교에서 자취를 감추고, ‘나’는 집안의 우환으로 인해 평생의 꿈이었던 루마니아 문학을 맥없이 접고 취업 그리고 직장인의 기로에 들어선다. 그리고 하트 모양 길고양이와 함께 스치는 은영에 대한 기억들은 손톱 밑 가시처럼 그의 마음 속에 걸려 있다. 그리고 오랜 그리움 끝에 접하게 된 그녀의 근황은, 다시는 그녀의 근황을 들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은영을 옆에 두고 싶어 선물한 루마니아 소설이 오히려 그녀가 그를 떠나게 한 이유가 되었으며, 그렇게 떠난 루마니아에서 결혼하고 이내 그곳에서 죽었다는 사실은 결코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소식이었을 것이다. 지나간 일을 되돌리려는 소망은 부질없으나, ‘나’의 입장에서는 그녀가 이른 생을 마감한 장소가 루마니아였다는 사실이, 그리고 그 루마니아로 떠난 계기가 자신이 소개해 준 작가였다는 사실이 부채감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그것이 손톱 밑 가시 만한 것일지, 아니면 어깨에 가득 짊어지고 가야 할 만한 것인지는 ‘나’만이 알고 있겠지만 말이다.
시선을 칼로 느낄 정도로 소외된 자의 삶을 살았던 은영의 소통에 대한 열망은 ‘나’와 문학으로 조금씩 구체화되었다. 흐릿했던 삶이 선명해지고, 신기루 같던 일상이 다채로워졌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 어느 것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홀로 커 버린 감정을 품어내야 했고, 삶의 템포는 너무 빨리도 끝이 나 버렸으며, 꿈은 이루지 못한 과거의 영광으로 남고 말았다. 함께 걸었던 모든 걸음이 모여 허망한 신기루 속으로 접어든다. 하지만 그 모든 걸음은 또한, 희미한 잔상을 남겼다. 추억이란 다시 돌아올 수 없기에 아름다운 것처럼 말이다.
‘나’는 열심히 소설을 번역해왔고, 은영은 그 소설로 저만의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가려 애썼다. 그리고 ‘나’는 그런 은영의 모습을 사랑―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내가 받은 감정의 인상은 사랑이었다―했다. 하지만 그는 작품을 읽은 후 감상은 나누었어도, 그가 번역해 온 소설을 읽는 은영의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그는 항상 그녀의 눈동자를 ‘가을의 눈동자’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작품의 말미에서, 그는 하트 무늬 고양이에게서 본 적 없던 ‘봄의 눈동자’를 보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은영에게도 봄의 순간이 있었을 거라고. ‘나’는 직접 보지 못했지만, 혼자 가만히 그의 번역을 읽어 내려갔을, 그 안에 담아낸 마음을 들여다 보았을 은영의 눈동자는 ‘봄의 눈동자’였을 지도 모르겠다고. 손에 잡히지 않는 허망한 신기루라고 해서 아름답지 않은 게 아니다. 언제 다 날아가 버릴지 모르는 희미한 잔향이라고 해서 강렬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