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질녘 노을에 마음을 뺏긴 어린 나는 먼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그 노을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마음이 아린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것의 실체를 확인하고 싶은 소망을 가슴속에 희미하게 품었다. 먼 곳을 동경했던 나는 스물넷의 여름, 엄마의 달콤한 제안과 만류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로 떠났다. 느닷없던 나의 선언을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한 번은 동화 속 마을 같은 이즈마일롭스키 벼룩시장에 갔을 때의 일이다. 시장 안은 좁고 여러 갈래의 길이 마치 촉수처럼 뻗어 있었다. 각종 러시아산 모피와 기념품이 눈을, 샤슬릭(러시아산 꼬치구이)를 굽는 냄새가 관광객들의 코를 현혹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언제부터인가 표가 날 정도로 우리 일행의 뒤를 두 남자가 따라다니고 있었다. 행여 소매치기일까 싶어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며 가방을 앞으로 돌려 멨다. 시장 입구에 다다를 무렵 그중 한 명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시리아에서 온 교환학생이라고 자기를 소개한 남자. 그가 말하는 러시아어에 온 신경을 집중하던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네가 마음에 들어. 그래서 네 주변을 서성였어. 너와 만나보고 싶어!” 갑작스러운 고백은 현실감이 없었다. ‘이건 마치 소설이나 영화 속에나 있을 법한 타국에서 생긴 일 같잖아!’ 그 남자의 절실한 눈빛에는 거짓이 읽히지 않았다. 문득 남자의 당돌한 용기가 질투가 날 만큼 부러웠다. 오해에서 시작된 만남이 어떻게 진행될지 궁금해하며, 다음 날 엠게우 기숙사에서 만나기로 하고 이내 헤어졌다.
반신반의하던 그 남자의 방문. 어둑한 기숙사 복도에서 한쪽 어깨에 가방을 걸쳐 맨 채 나를 기다리며 서 있었다. 혹시나 해서 옆 방 B에게 시리아 남자가 찾아오면 조용히 뒤에서 지켜봐 달라고 부탁해놓은 상황이었다.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는 없는 장면이다. 여행자에게 주어지는 자유 대신, 나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고슴도치였을 뿐이었다. 어색한 침묵과 가끔의 어색한 언어를 주고받으며 참새 언덕을 향하여 나란히 걸었다. 걷는 동안 나는 그 남자의 프로필을 훔쳐보았다. 약간의 곱슬머리에 170센티가 안돼 보이는 키, 시리아인에 대해 알지 못하지만, 시리아인 같은 외모를 지녔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색한 침묵을 깨트린 것은 산책 나온 커다란 개가 우리를 향해 무섭게 짖어대며 쫓아오면서였다. 그 순간 남자와 나의 거리도 자연스럽게 좁혀졌다. 그리고 조용히 뒤에서 따라오던 B를 발견하고는 그 남자는 멋쩍게 웃었다.
참새 언덕에 도착한 우리는 서로의 이름과 나라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나는 솔직히 시리아에 대해 자세히 모른다고 말했다. 종이 위에 시리아 언어로 내 이름을 정성스럽게 적어주던 그 남자와 지는 노을을 바라봤다. 나는 곧 한국으로 떠난다고 말했더니 금방이라도 울 것 같던 표정을 지었다. “네가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좋겠어. 며칠이라도 말이야!” 나는 그 표정을 보며 많은 생각이 스쳤다. 그동안 호감에 대한 표정을 저렇게 자연스럽게, 당당하게 지어 본 적이 있었을까.
며칠 후, 우리 일행은 뻬제르부르크로 향하는 밤 기차를 타고 일주일간의 여행을 떠났다. 기숙사로 돌아왔을 때 남아 있던 일행을 통해 매일 같이 내 방 문 앞을 찾아온 남자의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그 남자의 순정에 마음이 아렸다. 마치 어릴 적 노을을 보며 느낀 감정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