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형태와 별개로 불현듯 생을 그만두고 싶다는 마음이 불쑥 올라올 때가 있다. '이 상황에서 도대체 왜?'라는 의문이 드는 날들도 종종. 어제는 일주일 만에 간 운동을 뿌듯하게 끝내고 나오다가 문득 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처음 충동이 올라왔던 건 대학생 때였다. 몇 가지 장면이 기억에 남는데, 하나는 학교 수업이 끝나고 창밖을 바라보다 '여기서 떨어지면 한 번에 죽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불쑥 올라왔던 것, 다른 하나는 운 없게 눈 망막이 다친 어느 날 따끔거려서 제대로 울지도 못하는 채로 우울에 갇혀선 아무도 오지 않던 동아리 방에서 남몰래 감정을 쏟다가 차라리 사라지고 싶다고 생각했던 일.
그때는 내 마음을 주변에 보여주는 게 수치스러웠다. 하여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테다. 아, 주변에 정신과 약을 복용하고 있던 누군가는 은밀하게 내 상태를 살짝 알아채긴 했던 듯하다. 그렇다고 해서 굳이 친밀한 사이로서 나를 애틋하게 위로해 주거나 할 관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마음을 알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싫지 않긴 했다. 실은, 누군가에게 들키고 싶었으니까. 말하지 않아도 알아줄 대상이 필요했으니까. 동아리 방에서 마음이 무너져 내렸던 그날에도 내심 누군가 우연히 이곳에 찾아와 주기를 진실로 바랐었다.
그러다 언제 한 번 고등학교 친구가 나를 위해 눈물을 흘려준 적이 있었다. 이후 신기하게 당시의 조울 증세가 점차 나아져갔다. 어느 순간 잊고 잘 살게 됐다. 언제 어떻게 나의 한때가 흘러갔는지도 희미해진 채.
오랜만에 우울이 다시 찾아온 건 2019년이었다. 여성 연예인들이 연이어 스스로 생을 마감했고, 베르테르 효과라고 하던가. 그 말의 정의를 생전 처음으로 체감했다. 그때는 생의 의지가 감정에 짓눌려 소실된 채 시간을 지났던 것 같다. 잠시 스쳐갔던 대학 시절의 증세보다 몇 배는 위태로웠다.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과 죽음이 연결됐다. 정상적인 사고회로가 끊겨버린 상태였다. 우울감과 우울증이 다르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때 처음 깨달았다. 어떤 방식으로든 삶을 그만두고 싶다는 충동, 스스로를 다치게 하고 싶다는 마음. 그러나 혹여 한 번에 끝나버리지 않을 게 두려워 차마 그 어떤 시도도 하지 못했다. 홀연히 불현듯 사라져 버리는 게 주변을 위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어느 날엔 이러다 내가 정말 나를 해하게 해 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한가득 몰려와 문득 집 가는 길목에 앉아 혼자 엉엉 울고 말았다. 한껏 무너져내려 버린 날들.
어떻게 빠져나왔더라. 불행 중 다행히 종교가 꽤 도움이 되었던 것 같고, 상담을 받고 있을 때였고, 지지고 볶고 순탄하진 않았지만 옆을 지켜낸 연인이 있었고. 나를 포기하지 않아 준 어딘가의 힘 있는 내가 있었다.
여전히 완치되진 않았다. 전처럼 심각하지는 않아도 이따금 생각과 마음이 올라오곤 한다. 그래도 다행히 이제는 동시에 자각한다. "사실은 죽고 싶지 않으면서", "어째서 이런 마음이 올라오는 걸까.", "불쑥, 불쑥." 생의 의지와 삶의 소실 욕구가 공존하는 이 상태가 때로 혼란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우울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지만, 연결된 느낌.
이번주 상담에서는 이 마음에 대해 나누어 봐야겠다. 문득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위로가 찾아온다. 동아리 방에서 홀로 웅크린 채 진실로 사람을 피하고 싶은 만큼 또 절절히 바랐던 내가, 숨겨뒀던 마음을 용기 내어 꺼내본다. "사실은, 제가 이렇거든요"하고. 단어 하나, 행동 하나 그 어느 것도 무엇 하나 쉬운 게 없지만 이제는 그만 갇혀있던 문을 열고 싶다는 마음으로. 어쩌면 혼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