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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솜 Jul 08. 2024

10년째 상담을 받고 있다고요?

10년 차 내담자의 정신분석 상담에 대한 개인적 견해

   네, 받다 보니 어느새 세월이 이렇게나 흘렀네요.


  나처럼 상담을 오랫동안 받아온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심심한 응원과 지지를 보낸다.

  흔히들 이렇게나 길게 상담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머릿속을 스치는 삐죽한 생각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그 정도면 심각하게 아픈 거 아니야?"


  오랜 내담자로서 그러한 편견에 맞서 이야기하자면 긴 시간 상담을 지속해 온 사람은 어쩌면 당신의 생각보다 훨씬 강인할지도 모른다. 강한 사람은 아프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마음껏 무너지되 숱하게 일어서는 자다. 그리고 언젠가 분명 또다시 쓰러질 수 있음을 아는 사람이다. 이런 힘을 길러주는 과정이 상담이다. 사람은 정도의 차이일 뿐 누구나 무너지며 부서지는 때가 온다. 하물며 지금은 아무리 꼿꼿한 당신일지라도 말이다. 혹시 내 이야기가 달갑지 않게 들리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난 강하고, 무너지지 않는 사람이야"라는 관념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상태일 수 있다.


  긴 시간 정신분석 상담을 받는 건 분명 모든 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자기 자신을 견뎌낼 만큼의 자아 강도가 있어야 가능하다. 상담실에서 오가는 예측 불허한 대화의 흐름에 나를 내맡길 수 있어야 하며 그 안에서 올라오는 저항과 전이, 수많은 방어기제들을 전문가와 함께 손을 잡고 세밀히 다루어 가야 한다.

  치료적 퇴행 과정도 거쳐야 한다. 내면에 억누르고 부정해 온 수많은 기억의 실타래들이 풀어져 나오기 시작하면 꽁꽁 가둬두었던 더는 제어 불가한 달갑지 않은 어린아이들이 불시에 튀어나온다. 내가 이런 사람이었나? 싶은 혼란이 어느 날의 일상이 된다. 상담을 몇 회쯤 받게 되면 문제가 해결되어 금방 괜찮아질 거라는 생각은 단언컨대 오산이다. 정신분석 상담은 오랜 시간을 두고 꾸준히 진행되어야 치료적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 원칙이다. 또한, 그 효과란 내가 더 이상 아프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이 부분은 나의 다른 글에서 좀 더 다루어질 예정이다.

  이뿐인가? 스스로에 대한 치열한 고찰만으로도 당장 힘에 부쳐 어쩔 줄 모르겠는데 상담에 대한 편견과 나를 부정하고 싶어 하는 주변의 반응도 마주하며 감내해야 한다. 아무리 시대가 나아졌다고 해도 여전히 변하지 않은 지점들이 있다. 몸이 아파 병원에 다녀왔다는 이야기는 자기를 잘 챙기는 것과 연결되는데 마음이 힘들어 상담소나 정신과에 다녀왔다는 말은 여느 일상처럼 편히 이야기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있다. 상담 사실을 알리게 되면 여전히 존재하는 무형의 불편한 시선들이 느껴지고, 나를 예민하고 민감한 사람으로 여기는 순간들이 피부로 와닿는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단 하나다. 본인이 상담을 받아본 경우. 하물며 주변의 가까운 사람이 상담을 받았음에도 내담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흔하다. 나의 경우 어머니는 늘 내가 상담을 그만두길 원하셨으며, 한때 연인이었던 누군가는 "왜 속상하게 아직까지도 예전 일로 아파하느냐"며 걱정의 포장지를 두른 화살을 쏘기도 했다. 가장 아프고 싶지 않은 건 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가 마치 마법처럼 과거에서 벗어나 멀쩡해지기를 바랐다. 그에게는 내가 아프다는 사실보다 그런 모습의 나를 바라보는 자신의 마음이 좀 더 중요해서였겠지. 한 번은 한 친구가 마음이 힘들다기에 상담을 권했더니, "혹시 내가 그렇게 심각해 보여? 나 그 정도는 아닌데."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무래도 무의식 중의 실언인 듯했다. 분명 내가 평소 상담을 받아온 걸 알고 있는데. 네 머릿속의 나는 사실 심각한 사람이었구나.

  '상담을 받을 정도'라는 건 어떤 걸까. 늘 위태로워야만 상담을 받는 게 아니다. 상담소에서 나누는 이야기는 참 무궁무진하고 다양하다. 상상대로 무겁고 아픈 공간만은 아니다. 상태의 경중과 별개로 그저 개인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 받으면 된다. 그뿐인데, 여전히 사람들이 느끼는 상담에 대한 벽은 높고 거대하다. 물론 나 또한 상담을 시작하기 전엔 동일한 편견에 편승하여 살아왔기에 그들을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지만 이러한 반응을 마주할 때마다 달갑지 않은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겪어보지 않은 이를 이해시키는 건 어렵고, 상담을 받는 상태의 나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존중은 하지만 내가 그를 위해 어찌할 수 있는 건 없다. 


  이 모든 과정을 견뎌낼 힘이 있어야만 정신분석상담을 해나갈 수 있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다. 신뢰할만한 상담가와 치료 의지가 있는 내담자가 함께한다면 내면의 힘은 상담을 진행해 가며 자연히 길러진다. 다만, 정신분석은 당장 약이 필요한 사람에겐 치료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상담에 응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마음의 준비, 비용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결국 삶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할 확률이 높다. 정신분석은 스스로를 본질적으로 통찰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지만 그 진행 속도가 매우 느리고, 더디다. 과정 또한 지난하다.


  상담을 받기 시작한 지 몇 해 되지 않은 어느 날, 문득 선생님에게 물었다. 1년, 2년 시간이 흘러가도 삶은 크게 바뀌지 않은 것 같아 답답했다.


  "정신분석 상담은 통상적으로 얼마나 받아야 삶에 변화가 오기 시작하나요?"

  "평균적으로 500회 정도 된답니다."


  머릿속으로 그 정도면 얼마의 시간이 지나야 하는지 계산했다. 나의 경우엔 일주일에 한 번 받았으니 한 달이면 네 번, 일 년에 마흔여덟 번. 그러면 대략 최소 십 년 정도는 돼야 한다는 건가? 말도 안 돼. 난 그렇게까지 길게 받고 싶지 않아. 그런 사람들은 나보다 훨씬 심한 상태였겠지. 난 그 정돈 아닌걸?


  그랬던 내가, 이제 와서는 임상적 통계란 역시 신뢰할만한 자료구나 하며 깨닫는다.  


  이렇게 오랜 시간을 들이면서까지 상담을 받아온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나를 진실로 사랑하고 싶었거든요"하고 답할 테다.

  상담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그중 정신분석을 택한 이유는 내 어려움이 과거부터 형성된 무의식과 관련 있다고 확신해서였다. 당장의 증상 조절에만 초점을 맞춰 상담을 받고 싶진 않았다. 예기치 못하게 내 삶에서 사고처럼 벌어졌던 성범죄, 그로 인한 성에 대한 왜곡, 남성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 일상이 되어버린 불안과 과민증, 무기력, 무감각, 우울. 이런 것들이 나를 좀먹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순간 "이건 단순한 문제가 아니구나. 좀 더 면밀히 알아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정확히는, 그를 살피지 않으면 평생을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될까 봐 겁이 났다. 나를 이해하고 사랑하지 못하면 내 미래는 흑막 속에만 존재하다 스러질 것 같았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지금, 상담은 내 자존(自尊) 형성의 큰 기반이 되었다. 십여 년 전 용기를 내어 상담소를 찾은 내게 이 글을 빌어 대견하고 기특하다는 포근한 지지의 말을 건네주고 싶다. 그때의 내 주변엔 상담을 받아본 사람이 그 누구도 없었기에 이곳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내 인생 최후의 보루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후의 긴 세월을 꾹꾹 견디며 걸어와 준 나에게도 심심한 위로와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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