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었다 어딜 가야 할까

스물둘, 휴학생

by 글쟁이 오리


스물한 살의 나는 우울했고, 글을 썼다. 그리고 스물둘, 나는 휴학생이 되었다.


조기 졸업까지 계획할 정도로 나는 조급했고, 쉰다는 행위에 막연한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마치면 바로 대학에 들어가, 휴학 없이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유는 알지 못한 채. 그냥 다들 그렇게 사는 것 같았고, 어른들도 그 생각에 고개를 내젓지 않았으니까. 어른들이 하는 말이라면 맞겠지, 하고 따라왔던 게 문제일까.


초등학교 6학년, 담임 선생님과의 개별 면담 시간이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학교에 왜 다니냐고 물으셨다. 아마 친구들이랑 놀 수 있고, 재밌는 걸 배울 수 있고… 다른 친구들은 그런 이야기를 했던 모양이다. 나는 이렇게 답했다.

"의무... 교육이니까요?"

모호한 표정을 짓는 선생님을 보며 말을 바꿔 보았지만,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8살이 되니까 학교에 가라고 해서 가게 됐어요."


생각보다 오래도록 나는 의미를 모른 채 쉬지 않아 온 것으로 보인다. 나는 무엇을 위해 공부한 걸까?




1. 휴학 사유는 1500만 원입니다

휴학 신청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학교 시스템에서 버튼 하나만 누르면 신청이 완료되었다. 사유를 뭐라고 적었더라. 취업준비? 그런 거였던가. 휴학을 결심하게 된 건, 언제나처럼 온갖 걱정들로 가득했던 어느 새벽이었다.

'그래, 교환학생으로 뽑힌다고 쳐. 그럼 어떤 목적으로 가는 것이지? 독일어 실력을 향상하기 위해서? 하지만 무엇을 위해서 나는 독일어를 해야 하지? 독일어 교사가 되기 위해서? 임용 티오도 안 나는 데…

'아냐, 교사가 되지 않더라도 외국어를 할 줄 아는 건 큰 메리트가 되지. 그래, 외국어 경쟁력을 키우려는 것을 목표로 하자. 아, 돈은 어떻게 하지? 부모님께 신세 지긴 싫고, 내가 벌어서 가야겠다.

'비자를 발급받는 데 1500만 원이 필요하다고? 학교를 다니면서 1500만 원을 벌 수 있을까? 이건 무리다. 학업도 돈도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거야. 그럼 휴학하자. 나는 쉬는 게 아니고 휴학한 것뿐이야.'


그래서 나의 진짜 휴학 사유는 1500만 원이다. 1년 안에 1500만 원을 벌겠다. 나는 그 목표 하나로 신청 버튼을 눌렀다.




2. 학원에 다니는 학원 강사

과외와 토스트 가게 알바로는 1500만 원을 벌 수 없다. 그게 내 결론이었다. 따라서 나는 새로운 일을 찾기로 했다. 토스트 가게에 퇴사 의사를 밝히고 남은 기간 동안 사장님께서 감사하게도 다음 일자리를 찾아 주셨다. 그렇게 나는 하루아침에 강사가 되었다.


어느 일이 그렇듯, 처음 6개월은 어떻게 시간이 지나가는지도 모르고 보냈다. 주로 영어 수업을 맡았고, 내신 암기를 돕거나 방학 특강 때 교재를 활용해 수업을 하는 등 수업 준비는 크게 어렵지 않았다. 방학엔 독일어를 배우고 싶어 하는 중학생들을 데리고 독일어 초급반도 운영했다. 이것 말고는 기억이 또렷하게 나질 않아, 휴대폰 갤러리와 블로그를 뒤져봤는데 일을 시작하고 반년 간의 기록이 그 어디에도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산 거람?


9월, 일을 시작한 지 반년쯤 되었을 때 작성한 블로그 글을 발견했다. 원래 이야기한 것과 다르게 주 6회를 일하고 있었다고 하고, 월급이 밀려 슬퍼하는 모습도 확인할 수 있었다. 말 한 번 꺼내면 해결될지 모르는 일을 혼자 끙끙 앓고 있었나 보다. 사실 몇 년이 흐른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것 없지만 말이다.


학원 강사지만 학원도 다녔다. 신촌에 있는 유명 독일어 학원. 내가 사는 곳에서 1시간 조금 넘게 걸리는 학원에 아침 일찍 갔다가 돌아오면서 자연스럽게 출근-! 독일 교환학생을 가려면 필수로 제출해야 하는 FLEX 시험을 위한 학원이었다. 학생들은 가끔 내가 무엇을 하다 학원에 출근하는 지를 궁금해했다. 나는 말이지, 사실 학원에 다니는 학원 선생님이야.




3. 독일 함부르크로-!

한국외대의 대부분의 언어과 학생들은 해외에 나가 볼 기회가 있다. 교환학생이나 파견학생, 해외 인턴 등 다양한 해외 경험을 제공한다. 내가 지원한 교환학생도 사실 어느 대학에 붙느냐의 문제지 탈락할 일은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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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가고 싶었던 학교는 함부르크 대학교. 대도시에 위치해 있고, 1년 수학이 가능하면서, 한국학과도 있어 언어교환 프로그램이 잘 되어 있었다. 다만, 기숙사가 너무 비싸고 구하기 어려워서 3 지망으로 지원했다. 그런데 운명처럼 함부르크 대학교로 최종 확정! 오히려 좋다고 생각했다.


이때부터 나는 들떴다. 와 - 이게 청춘인가! 독일에서 하고 싶은 일들도 생각했다.

<독일에서 할 것이라 다짐하는 것들의 목록>
- 예쁜 화병을 살 거다. 그리고 꽃을 사다가 꽂아 둘 거다. 시들기 전에 다른 꽃으로 바꿔가면서.
- 극장을 밥 먹듯이 갈 거다. 연극, 뮤지컬, 오페라 다 볼 거야.
- 요리를 많이 해야지! 일하느라 요리할 일이 없어서 너무 슬펐으니까. 한식 파티를 열어도 좋겠다.
- 사진을 많이 찍을 거다. 최신 아이폰으로 바꾸고 가고 싶다.
- 동물 공포증을 고치고 싶다. 독일은 반려동물 관리를 잘하는 것 같던데.
- 벌레를 잘 잡는 어른이 되고 싶다. 좀 멋있을지도.
- 유럽 곳곳을 여행 다닐 거다.

독일에서 1년을 보내고 한국으로 돌아올 때쯤,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다고 느꼈다. 하지만 오늘 보니, 스물두 살의 내가 목표로 했던 것들은 다 이루었구나 싶다. 나는 이제 동물을 조금 덜 무서워하게 되었고, 벌레를 잘 잡게 되었고, 요리를 하고, 극장을 밥 먹듯이 가고, 꽃을 살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지난 유럽 여행을 사진으로 기록해 두었고, 매일매일 꺼내보는 습관도 생겼다. 이쯤이면 많은 걸 이룬 것 같은데!




4. 파워(리스) 블로거

교환학생을 준비하며 휴학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너무 할 일이 많았기 때문! 교환학생은 학교에서 지원해 주는 것이니까 할 일이 많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면 크나큰 오산. 학교에서 해주는 거라곤 내가 작성한 서류가 잘 쓰였는지 정도를 확인해 주는 것뿐이었다.


CV, 어학능력 증명, 온라인 지원, 기숙사 계약, 비자 발급까지 모든 걸 알아서 해야 했다. 매뉴얼이라고 주는 파일도 그리 친절하진 않아서 온갖 인터넷 자료를 찾아서 해결해야 했다. 또 하나의 문제는 함부르크 대학교 교환학생 블로그 같은 것들이 당시에 정말 적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심했다. 내가 함부르크 교환학생 블로그를 운영하겠다고!


교환학생 선발부터 출국까지 월별로 진행되는 순서에 맞춰 준비 과정을 상세히 올렸다. 다음에 가는 사람들은 조금은 편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 덕분에 이 글들은 교환학생 선발 시즌 때마다 조회수가 크게 오르는 효자 포스팅이 되었다. 이 작은 함부르크 교환학생 세계에선 나름의 파워 블로거(?)가 된 것이다. 하지만 파워가 그리 강하진 않은.


"네가 그 블로그 쓴 사람이었어?" 재밌는 것은 나와 함께 교환학생을 준비한 친구들도 나의 블로그를 보면서 준비했다는 것이다. 성격이 급해서 모든 일을 빠르게 처리하고 블로그에 올렸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함부르크 대학교의 교환학생 담당 교수님이 한국인이셨는데, 이 분께서도 내 블로그를 이미 다 읽어 보셨다는 것. (큼, 기숙사 구리다고도 써 놨는데.) 그래서 이후에 교수님 요청으로 교환학생용 사이트를 새로 꾸리는 데 도움을 드리기도 했다.




5. 그래서 1500만 원은?

결론부터 말하자면 1500만 원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 개인 약속 없이 매일 일만 계속한 결과랄까. 돈을 버는 데 쓰지를 않으니 모으기가 상대적으로 쉬웠을 것이다. 또 부모님과 함께 살았으니까 추가로 드는 비용도 없고 말이다. 거래 은행별로 상품을 잘 살피고 가장 잘 맞는 적금을 들어 돈을 불린 것도 좋은 선택이었다. 스스로 벌어서 비행기도, 숙소도, 기숙사 계약도, 비자도 모두 나의 돈으로, 나의 노력과 눈물로 해결했다. 부모님께 짐을 지우지 않아도 되어서 너무도 다행이고 뿌듯했다. 이제 정말 혼자 사는 법을 배우게 된 것이다.



하여튼, 내 스물두 살은 그랬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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