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운동을 마치고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요즘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안부를 여쭤보려던 참이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번 주 교회에서 있었던 일을 전해주셨다.
지난주 교회에서 젓갈 바자회가 열렸다고 한다. 여러 권사님들이 바자회를 성공적으로 마치기 위해 힘을 모으셨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열심히 참여하셨던 네 분의 권사님이 계셨다고 했다. 그런데 연말 겸 공로상을 수여하는 자리에서 네 분 중 세 분만 상을 받고, 나머지 한 분은 받지 못했다고 하셨다. 이 이야기를 하시면서 어머니는 속상한 마음을 털어놓으셨다.
"같이 고생했는데 왜 세 분만 상을 주고, 한 분은 빠뜨렸을까? 그분 마음이 얼마나 상했을지 모르겠어."
그 말씀을 듣고 나도 어머니 말에 공감했다. 상을 주는 기준이 무엇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함께 노력한 사람 중 누군가를 배제한다는 건 그 자체로 서운함을 느끼게 한다. 상을 받지 못한 권사님의 마음이 얼마나 속상했을지 짐작이 갔다.
어머니는 이어서 점심 식사 자리에서 그 권사님과 마주쳤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분이 '내가 상복이 없다'며 한숨을 쉬시더라. 왜 그렇게 일을 해서 사람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냐고 하시는데, 듣는 나도 참 안타깝더라고."
그 권사님의 서운한 마음이 얼마나 깊었을지 어머니의 목소리에서도 느껴졌다. 상을 받지 못한 것 자체보다, 같은 노력을 했는데도 인정받지 못했다는 점이 더 마음을 아프게 했을 것이다. 나 역시 그 마음이 조금은 이해되는 듯했다.
'정말 왜 그렇게 했을까? 그냥 다 같이 고생했다고 상을 드리면 좋았을 텐데…'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생각에 잠겼다. 큰돈이 드는 것도 아닌데, 모두에게 상을 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 작은 배려가 모두를 더 행복하게 만들었을 텐데 말이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얼마 전에 읽었던 나발 라비칸트의 어록 한 구절이 떠올랐다.
"어른은 없다. 모든 사람은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행동할 뿐이다."
어른처럼 보이는 사람도, 때로는 경험과 연륜이 많은 사람도 결국 자신의 기준과 상황에 따라 움직인다. 오늘 들은 교회 이야기를 떠올리며 이 말이 더 깊이 와닿았다.
'어른스럽다'는 무엇을 의미할까? 흔히 어른답다는 말에 성숙함과 배려를 떠올리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대부분의 사람은 욕심과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상황에 따라 자신의 욕망과 필요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일지도 모른다.
공로상 명단에서 한 권사님을 제외했던 행동도 마찬가지로 보였다. 아마 누군가를 일부러 배제하려는 악의가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저 주어진 기준에 따라 판단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 판단이 누군가에게 깊은 서운함을 남겼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속으로 다짐했다.
'나는 절대로 저러지 말아야지.'
그런데 이내 또 다른 질문이 떠올랐다.
'너는 그런 사람들보다 좀 더 낫다고 생각하니?'
이 질문을 떠올리니 답은 분명했다. 나도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냥 내가 정한 기준에서 스스로 우월하다고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나도 타인을 비판하고 불편해했던 순간들이 있었다. 뉴스 속 정치인이나 연예인, 때로는 사회적으로 비난받는 사람들을 보며 쉽게 판단했다. 회사에서나 가까운 지인의 행동에도 아쉬움을 느끼며 속으로 불만을 품었던 적도 많았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보다 내가 더 나은 점이 하나라도 있었을까?
우리는 모두 부족한 사람들이다. 남보다 나은 척할 뿐, 본질적으로 모두 비슷하다. 누군가의 실수를 비판하며, 내가 더 나은 사람이라 착각하는 순간, 성숙함에서 멀어질 뿐이다. 나발 라비칸트의 말처럼 "어른은 없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상황에 맞게 행동할 뿐이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생각했다.
'타인을 판단하고 비판하기 전에 나 자신을 돌아보자.'
내 부족함을 인정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것이 어른에 가까워지는 길이 아닐까. 교회에서 있었던 작은 일이지만, 내게는 깊은 깨달음으로 다가왔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사람은 없다. 스스로를 돌아볼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