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는 90년대에서 왔다: 시즌 2

귀걸이와 시세차익

by 재미나이


네? 누구시라고요? 아, 안녕…하세요?”
밥만 먹고 유령처럼 사라진 공감못해남이 다음 날 아침, 마치 세상에서 제일 급한 미션을 받은 첩보원처럼 전화부터 걸어왔다.
“재미나이씨, 귀걸이 사진 몇 개 보내줄 테니 골라요.”
뭐? 자기 엄마 선물 고르라는 건가?
“재미나이씨, 안목이 얼마나 고급스러운지 한 번 봅시다.”
하… 이게 농담이야, 도전이야, 아니면 그냥 정신 나간 거야?

사회생활 10년 차, 나조차 그의 대화는 물음표 폭격기였다.

“그런데… 왜 제가 귀걸이를 골라야 하죠?”
“재미나이씨 주려고요.”
“저… 귀걸이 필요 없어요.”
“여자들이 좋아하는 선물 1위가 귀걸이라더라고요. 하핫, 비싼 건 아니에요. 홍대에서 수공예로—”
뭐야, 내 말 안 듣는 거야, 일부러 무시하는 거야? 나는 기분이 상해서 입을 다물었다.

이 남자, 대화가 아니라 그냥 검색엔진 결과 읽는 중인가?

“제가 별 모양으로 골랐어요. 토요일에 뵙죠.”
“네? 저 토요일에—”
“주말 데이트 계획은 네이버나 구글맵 쓰면 되죠. 여자들이 좋아하는 여행지 1위—”
하아… 이쯤 되면 벽에 대고 말하는 것도 이보다 나을 거다. 그는 오후 내내 여성 잡지라도 뒤진 듯 “여자들이 좋아하는” 1위 리스트를 줄줄 읊었다.

오,구글, 제발 이 인간 검색 기록 좀 지워주세요.


토요일, 다행히 그는 계절에 맞는 옷을 입고 왔다.

오, 드디어 20XX년에 착륙했나? 하지만 희망은 거기까지였다.
“전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거 싫어요. 항상 혼자 다녔죠. 회사 다닐 때도 혼자였어요.

그러다 누가 당진에 땅 사라고 해서 샀는데, 그게 시작이었죠. 모텔도 하고—”
그는 마치 부동산 세미나 강사처럼 떠들기 시작했다.

야, 나도 돈 없어서 재테크 안 하는 줄 아는 거야? 하루 종일 일에 치여 집에 가면 유튜브나 겨우 볼 정신인데, 이 인간은 나를 무슨 게으른 회사원 취급? 일을 제대로 안 했으면 그 시간에 부동산 공부나 했겠지, 알아?

“저, 전요… 말이 통하는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내가 진지하게 꺼낸 말에 그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대꾸했다.
“여기 아파트 청약 넣으면 시세차익 5천만 원이에요. 다음 주엔 1억 차익 나는 거 나와요.”
오, 그래, 축하해. 근데 내가 왜 그걸 알아야 하지? 그의 세계는 숫자와 데이터로만 굴러갔다.

사람? 감정? 공감? 그런 건 그의 엑셀 시트에 없는 항목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아무리 비싼 정보, 억 소리 나는 자산 이야기를 늘어놓아도, 내겐 그저 벽에 메아리치는 소음일 뿐이었다. 집에 돌아와 피로와 허탈함을 씹으며 생각했다. ‘말이 통하는 사람’이야말로 내게 가장 사치스러운 결혼 조건이었다. 그리고 그 조건은, 그의 당진 땅값이나 아파트 시세차익으론 절대 채워질 수 없었다.



We spoke the same language, but he was preaching to a spreadsheet.
(같은 언어를 썼지만, 그는 엑셀 시트에 설교하고 있었다.)
“사랑은 서로를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다.”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근데 이 남자, 나랑 같은 행성에 있는지도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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