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가난했지만 더 부유했다.

by 재미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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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의 이상한 빌런들을 겪고 나니, 사람 만나는 게 슬슬 겁났다.
예전엔 “아니면 말지 뭐” 하며 가볍게 넘겼지만, 이제는 시간도, 마음도 그 시절 같지 않았다.
주말은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이어야 했고, 굳이 에너지를 쏟아 만나는 건 더 이상 가벼운 이벤트가 아니었다.


“시간은 모든 것을 앗아가지만, 아무도 그걸 막을 수 없다.” – 칼릴 지브란


감정이 씁쓸하게 마모되는 게 두려웠다.

“재미나이님~! 다른 분들 얼마나 열심히 만남하고 계신지 몰라요!”
결혼정보회사 매칭 매니저가 오랜만에 전화를 했다.
명랑한 목소리 뒤로, 컴퓨터 타닥타닥 소리가 들렸다.
저 너머, 누군가도 ‘괜찮은 한 사람’을 찾으며 데이터 속 프로필을 고르고 있겠지.
나도 그 데이터 중 하나일 테고.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에 의해 만들어진다.” – 존 메이저


“이번 주말에 괜찮아요?”
“네…”

“너무 잘됐어요! 감성남님 만나보세요~ 인물 준수, 키 크시고…”
이어지는 자산 스펙 나열에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건 소개팅이 아니라 재무설계 세션이잖아.

이 회사에선 집 없는 남자를 본 적이 없었다.
마치 다른 차원에 사는 사람들. 신기하면서도 묘하게 소름 끼쳤다.


“결혼정보회사는 이미 돈 있는 남자들이 여자 찾으러 오는 곳 아냐?”
결혼 6년 차, 부동산 전문가로 거듭난 기숙사 친구가 말했다.

“그래? 난… 돈 없는데…”
“야, 모아둔 돈 없냐?”
“있긴 한데… 너무 적어서…”
“무조건 있다고 해. 요즘 남자들 여우 같아서, 여자 돈 없다는 말에 바로 마음 접는다. 통장 증명서 내라고 하진 않을 걸?”

그녀의 말엔 냉혹한 현실의 무게가 실렸다.
예전엔 우리가 좋아하는 선배와 헤어진 나를 밤새 위로하며 같이 울고, 시험 망쳐서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캠퍼스에서 알아주는 인기녀였다.나는 그런 인기녀 옆에 항상 붙어있는 통통한 조연.
우리는 기숙사에서 유치한 장난을 계획하며 깔깔거렸고, 방학이면 여행 다니며 맛집을 찾아다녔다.
내가 외국에 있을 때, 그녀는 친구들과 돈까지 모아서 날 보러 와준 고마운 존재였다.


“그때의 우리는 지금보다 가난했지만, 더 부유했다.” – 작자 미상


그랬던 그녀가 이제는 성북동 재개발 지역에 과감히 투자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있다고 해.’ 그 말이 입안을 맴돌았다.
우리는 젊고 가난했지만 감정만은 아름답게 반짝였다.
그 순수한 마음은 이제 ‘돈’이라는 묵직한 조언으로 변해버렸다.

나는 전화를 끊고도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마치 눈앞에 커다란 전광판이 켜진 듯, 숫자와 그래프가 머릿속을 점령했다.
그렇게 주말, 나는 ‘만남’이라는 이름의 재무설계 세션에 앉아 있었다.



"한때는 계산 없이 모든 감정을 밤새 쏟아내고, 그저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 충분했던 시절이 있었다. 중요했던 건 조건이 아닌 진심이었다. 그런데 이제, 완벽하게 계산된 조건 앞에서 나는 또 다른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다. 과연 이 숫자들의 합이 '행복'이라는 최종 결과에 도달할 수 있을까. 혹은 우리가 놓치고 있는 진짜 가치는, 그 어떤 계산으로도 측정 불가능한 영역에, 여전히 그 순수했던 시간 속에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To be yourself in a world that is constantly trying to make you something else is the greatest accomplishment." - Ralph Waldo Emerson

(끊임없이 당신을 다른 사람으로 만들려 하는 세상에서 당신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이 가장 위대한 성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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