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조건부로 시작합니다.

by 재미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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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속 영어표현

“I came to mock my choices. He came to make me forget them.”

나는 내 선택을 비웃으러 왔고, 그는 그걸 잊게 하러 왔다.


호텔 로비는 멋지게 차려입은 사람들과 세련된 수트케이스를 든 여행객들로 북적였다. 고급 호텔이라 그런지, 카페에 앉은 모두가 인스타 감성을 뿜으며 여유로운 척 커피를 홀짝였다. 문득, 회사 동료가 떠올랐다. 그녀는 어떤 블로거가 이 호텔에서 돈 많은 남자를 낚았다는 썰을 듣고, 연봉의 1/3을 회비로 내고 휘트니스 센터에 등록했던 그 굳은 결심의 순간. “재미나이, 넌 나만 믿어!” 그녀가 내게 속삭였던 그 말.


뭘 믿으라는 거야? 내가 설마 너처럼 속물로 여기서 남자 구걸할 거 같아? …응, 근데 지금 내가 딱 그 짝이야.


내 앞에 놓인 커피잔이 파르르 떨렸다. 5만원짜리 커피. 나 같은 사람에겐 일주일 점심값이다. 이 한 잔은 뭐지? “우리가 지불하는 대가는 우리가 원하는 것의 가치이다.” 오스카 와일드의 이 말처럼, 이 커피는 내가 발을 들인 럭셔리 세계의 입장료였다. 나는 또다시 매니저의 “이번엔 진짜 다르세요!”를 믿고 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재미나이씨? 오우, 반가워요!”
맞은편에서 기다리던 남자가 감성 충만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세련된 슈트, 살짝 흐트러진 헤어, 그리고 ‘감성’이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사는 듯한 미소.
“아, 네… 재미나이에요. 반갑습니다, 감성남님. 일찍 오셨네요?”
“하하, 숙녀분에 대한 감성적인 남자의 매너라고나 할까요?”

뭐야, 이 남자 또 감성 타령이야? 또 빌런 냄새가 난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커피를 홀짝였다. 제발, 이번엔 제대로 된 인연이었으면!

“재미나이님, 여기 너무 딱딱하죠? 제가 아는 감성적인 이자카야로 가시죠! 거기서 간단히 밥 먹고, 술 한 잔? 아, 걱정 마세요! 음주운전 안 해요. 대리 불러서 집까지 감성적으로 모셔다 드릴게요.”

그는 약간 들떠서 말을 쏟아냈다. 이야기를 나눠보니, 감성남은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업계에서 꽤 잘나갔다. 수상 경력도 화려하고, 나이 들어도 ‘감성’ 덕에 일이 끊이지 않는다고. 그러면서 찡긋 윙크. 뭐지, 이게 ‘너는 집에 있어도 돼’ 신호인가?

“강아지 좋아해요? 이거 보세요, 제 아들이에요!”

그는 폰에서 강아지 세 마리 사진을 자랑스레 보여줬다.

“제가 파주에 집이 하나 더 있거든요? 거기서 찍은 거예요.”

파주에 집? 그럼 집 두 채? 나는 동료를 속물이라 까던 과거를 잊고, 그의 집 두 채 발언에 귀가 쫑긋 섰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을 가지려 한다.”

조지 버나드 쇼의 이 말처럼, 나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인가 보다.


평범한 공무원 집안에서 자란 나는, 돈이 늘 투명한 벽처럼 느껴졌다. 엄마는 백화점 옷을 사본 적 없고, 나는 저녁마다 오순도순 가족과 이야기를 나누며 자본주의의 상처를 치유했다. 그래도 나는 나름 만족할만한 대학에 갔고, 사교육 없이도 제법 잘 살아왔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 돈에 대한 갈증, 평범함을 벗어나고 싶은 발버둥이 있었던 걸까?


“재미나이씨, 오늘 느낌 좋아요. 우리 감성 잘 맞는 것 같아요. 어때요? 서로 어떤 감성을 가지고 있는지 더 알아볼까요?”

파주 집 생각에 빠져 있던 내 속물 근성에 그의 경쾌한 목소리가 찬물을 끼얹었다.

“아, 네… 좋아요!” 까짓거, 해보자. 모 아니면 도지! 아니, 어쩌면 모도 도도 아닌, 또 다른 계산식을 찾아 떠나는 여정일지도.

낭만적인 사랑을 꿈꾸던 나는, 파주 집 두 채에 귀가 솔깃해지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남의 속물 근성을 비웃던 내가, 어느새 조건이라는 미로에서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사랑은 이상을 추구하지만, 현실은 우리를 배신한다.” 알렉상드르 뒤마의 이 구절처럼, 사랑에 조건이 없다는 말은 모든 조건이 충족된 이들의 특권일지도. 아니면, 완벽한 조건이란 그저 환상일 뿐, 그 안에서 우리는 순수한 마음을 잃어버리는 걸까? 끊임없이 더 나은 조건을 갈망하는 이 계산의 끝에는, 과연 어떤 감성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결혼 시장은 낭만과 조건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게 만드는 곳이다. “우리는 진짜 자신을 숨기고 살아가지만, 진실은 언제나 우리를 찾아낸다.” 알베르 카뮈의 이 말처럼, 감성남의 화려한 말과 파주 집 두 채 뒤에도 진짜 모습이 숨어 있다. 재미나이의 자조적 유머는 이 미로 같은 시장에서 다크서클까지 끌어안을 진심을 찾아낼 힘을 줄 것이다. 사랑은 계산기가 아니라, 어쩌면 그저 함께 커피를 홀짝이며 웃을 수 있는 순간에서 시작될지도.
"True abundance isn't based on our net worth, it's based on our self-worth."- Gabrielle Bernstein
"진정한 풍요는 순자산(net worth)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가치(self-worth)에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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