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오후, 서울 시내 대학교 강당은 호기심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는 두 번째 강연자였고, 고맙게도 나를 위해 앞쪽 VIP 자리를 예약해 두었다. 뜻밖의 특석 대접이네. 살짝 들뜬 기분으로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속으론 의심이 스멀스멀. 이 남자, 또 무슨 감성 쇼 하려는 거야?
그는 강연이 나 같은 회사원에게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될 거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그의 말은 잘 포장된 AI 회사 세일즈 피치 같았다. 당시 AI는 대중에게 생소했고, ChatGPT가 세상을 흔들기 전이라 사람들의 호기심은 뜨거웠다. 그는 그 열기를 등에 업고 무대 위에서 빛났다. “AI가 세상을 바꿀 겁니다! 회사원들, 특히 여러분은 곧 해고될지도 몰라요!”
뭐야, 이 공포 마케팅? 그는 디스토피아 영화 속 예언자처럼, 우리 같은 평범한 직장인들이 기술의 파도에 휩쓸릴 거라 겁을 주었다. “공포는 사람을 움직이게 하지만, 호기심은 사람을 성장시킨다.” 니체의 이 구절이 떠올랐다. 나는 신기술을 좋아한다. AI든 뭐든, 새로운 걸 체험하는 건 즐겁고 긍정적인 일이다. 하지만 공포심으로 사람들을 몰아붙이는 그의 방식은 영 마음에 안 들었다. 즐거움과 호기심이 기술의 바탕이어야 한다는 내 믿음 속에서, 그의 강연은 점점 독재자의 연설처럼 보였다.
이때부터 눈치챘어야 했나… 그의 자신만만한 미소, 관객을 압도하려는 제스처. 이 남자, 그냥 세일즈맨이 아니라 AI 독재자 아냐? 앞줄에서 다크서클을 꾹 누르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야근으로 영혼이 반쯤 빠져나간 내가 이런 강연까지 소화해야 하다니. 사랑도 노동이네, 진짜.
강연 중 그는 나를 힐끔 보며 윙크했다. 뭐야, 또 감성 쇼야? “재미나이씨, 이거 다 미래를 위한 겁니다. 우리 같이 AI 시대 준비합시다!” 강당이 환호했지만, 나는 속으로 한숨. 미래 준비? 나 지금 보고서 하나 쓰는 것도 벅찬데.
강연 끝나고 그가 다가와 말했다.
“어때요, 감동받았죠? 우리 같이 AI로 세상 바꿀까요?”
세상 바꾸는 건 너나 해. 나는 억지 미소로 답했다.
“네, 정말… 인상 깊었어요.”
“진실은 때로 과장된 포장 속에 숨는다.” 헤르만 헤세가 말했다.
그의 화려한 말 뒤에 불안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 남자, 진짜 인간일까, 아니면 AI가 만든 스크립트를 읽는 로봇일까?
며칠 뒤, 우연히 변호사 시험을 준비하는 늦깍이 로스쿨 재학생 친구를 만났다. 뒤늦게 어린 친구들과 경쟁하며 시험 준비로 지친 그녀를 위로하고,괜히 웃긴 농담을 하고 싶어 나는 강연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나의 속물근성도 살짝 섞였다. 그건 아마도...나 이런 사람도 만나본다? 그런데 내 이야기를 한참 듣던 친구가 고개를 갸웃했다.
“야, 네가 말한 그 AI 변호사 이 사람이니?”
친구가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화면엔 지난 주말 “회사원은 다 해고될 거다!”를 외치던 그 남자였다.
“어, 맞아! 꽤 유명한가 보네?”
그때 친구가 들려준 이야기는 거의 마블 악당급이었다.
화려한 로펌 대표의 겉모습 뒤엔 신입 변호사들을 쥐어짜는 빌런이 숨어 있었다. 그는 신입들을 초봉 1억 미만으로 갈아 넣으며 AI 윤리를 설파했고, 로스쿨 학생들을 ‘인턴’이라 속여 무급으로 부려먹고, 시험 낙방생들을 대타로 채용해 소모품처럼 버린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그녀는 그의 소문을 이야기 하며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강연장에서 “미래를 준비하라!”를 외치던 그 입이, 로펌 사무실에선 “야근 더 해!”를 내뱉고 있었다니. 이 인간, AI보다 더 기계적인 독재자였네. 나는 그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진실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만, 때로 우리를 실망시킨다.” 는 존 스튜어트 밀의 말이 옳았다.
그의 이중성은 내 연애 기대치를 또 한 번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결혼 시장에서 만난 또 한 명의 빌런. 아까운 내 주말은 그런 빌런의 이중적인 강의와 함께 날아가버렸다.
AI가 우리에게 묻는다. "준비되었나요?"이 질문은 기술의 발전 속도에 대한 경고처럼 들리지만, 어쩌면 관계의 미래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AI가 만들어내는 완벽한 결과물에 환호하면서도, 정작 인간관계에서는 갈수록 서툰 모습을 보인다. 강연장에서 만난 그 남자는 AI가 세상을 바꿀 것이라 외쳤다. 그의 말은 완벽한 스크립트였고, 계산된 제스처였으며, 냉철한 논리였다. 마치 잘 훈련된 AI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의 화려한 가면 뒤에는 신입 변호사들을 쥐어짜고, 로스쿨 학생들을 착취하는 비윤리적인 민낯이 숨어 있었다. 그는 AI보다 더 기계적으로 타인을 이용하며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빌런'이었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AI보다 더 무서운 것은 AI의 기술을 빌려 자신의 이중성을 합리화하려는 인간의 속물근성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기술의 발전 속도에 맞춰 끊임없이 자신을 업그레이드하지만, 정작 인간을 대하는 윤리와 도덕은 퇴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결국, 나는 '사랑'이라는 노동의 끝에서 AI가 아닌, 인간 본연의 결함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쁜 기운'은 사주팔자나 미신이 아니라, 완벽한 가면 뒤에 숨은 거짓과 오만이라는 것을. 이 글은 그 모든 '가짜'들에게 보내는 냉소적이고 유머러스한 작별 인사다.
“He spoke like a visionary, but acted like a machine.”
그는 비전가처럼 말했지만, 기계처럼 행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