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AI였다.

by 재미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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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나이님, 이번엔 좀 대단한 분이에요!”

매니저의 목소리가 전화 너머에서 반짝였다.

“아, 네…”

솔직히 매번 “대단한 분” 타령에 이제 놀랍지도 않다. 이메일을 클릭하니 단정하게 생긴 남자가 씩 웃으며 나를 맞았다. 와… 이건 뭐, 대한민국 엘리트 코스 뷔페야. 변호사, 카이스트 졸업, 인공지능 연구, 로펌 설립까지. 프로필 스크롤할 때마다 화려한 이력이 폭죽처럼 터졌다. 이런 사람이 왜 소개팅 시장에 나와? “제가 재미나이님이 힘들어하셔서 좋은 기회 드리려고요.” 매니저의 말에 살짝 욱했다. 뭐? 누가 누구한테 좋은 기회라는 거야? 자격지심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가장 위대한 것은, 결코 넘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일어서는 것.” 콘 시우스의 이 말은 내 상황에 딱 맞았다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구나. 나는 회사에서 보고서 하나 쓰는 것도 허덕이는데, 이 사람은 변호사 하면서 AI 연구하고, 로펌 세우고, 심지어 잘생기기까지 했다. 이 인간이 이 모든 걸 해내는 동안, 나는 뭘 했지? 팀장 뒷담화? 넷플릭스 정주행? 자조적인 헛웃음이 터졌다.

“야, 변호사 하면서 카이스트 졸업하고, AI 연구하고, 로펌까지 세운 사람 어때?”

옆자리 동료에게 프로필을 보여주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말했다.

“이거… AI 아냐?”

“놀라지 마. 방금 이 모든 걸 해낸 사람 실제로 봤어.”

“와… 세상에 나만 낙오자네.”

동료는 피식 웃으며 보고서로 시선을 돌렸다. 내 어리석음에 나는 익숙했지만, 이 사람은 어리석음과 거리가 멀어 보였다.는 모니터를 보며 중얼거렸다. 대단한 사람들 사이에서, 난 오늘도 하루치 버티기를 한다. 나는 도저히 손이 안 갔다. 솔직히, 이런 사람 만나기가 부담스러웠다. 매니저에게 전화해 “안 나갈게요”라고 선언했지만, 매니저는 끈질겼다. “그쪽에서 꼭 만나보고 싶다시니 부담 갖지 마세요!” 옆에서 동료가 낄낄대며 말했다. “가서 진짜 인간인지 AI인지 확인해봐.” 결국, 나는 나가기로 했다. 그래, AI면 어때. 한 번 만나보자고.

그리고 마침내 만남의 날. 카페 문을 열자마자, 나는 멈칫했다. 보통은 테이블에 앉아 있어야 하는데, 그는 서 있었다. 그것도 창가에. 그것도 산을 바라보면서. 나는 의자에 앉지도 못한 채 그를 올려다봤다. “산 보면서 뭐 하세요?” 그가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아, 제가 소설도 씁니다.” …네? 변호사 아니었나요? “저, 산을 배경으로 작품 구상을 좀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창밖을 가리키며, 마치 노벨문학상 시상식장에서 수상 소감을 말하듯 덤덤히 덧붙였다.

그러더니 내 눈을 똑바로 보며 물었다. “재미나이씨는 시간 있을 때, 자기 발전을 위해 뭐 하시죠?” 삐뽀삐뽀! 내 머릿속에서 사이렌이 울렸다. 이 사람… AI 맞네. 아니, 인간이 이렇게 완벽할 리 없잖아! 변호사, AI 연구원, 로펌 CEO, 소설가까지? 다음엔 뭐, 우주 비행사 하겠다고? 나는 얼떨결에 대답했다. “저는… 넷플릭스 보고… 커피 마시고…” 그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죠, 단순함 속에 진리가 있으니까요.” 뭐야, 이 사람 진짜야, 가짜야? 대화는 계속 그의 ‘멀티태스킹 인생’ 자랑으로 흘렀다. “작년에 소설 한 편 썼는데, AI 윤리에 관한 거라서…” “가장 깊은 감정은 언제나 침묵 속에 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이 구절을 나는 커피를 홀짝이며 생각했다. '참, 이번 주 주말에 시간 있어요? 내가 XX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거든요. 재미나이씨 같은 회사원은… 아무튼 도움이 많이 되실 거예요.' 그는 나의 바쁜 일상과 고뇌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다음 스케줄을 통보했다. 이 사람, 진짜면 너무 부담스럽고, AI면 더 무섭네. 그럼 나, 이 만남 어떻게 끝내지? 결국, 나는 웃으며 물었다.

“혹시… AI 아니시죠?”

그는 껄껄 웃더니 대답했다.

“하하, 재미나이씨, 재밌네요. 근데 저도 가끔 제 자신이 AI 같아요.”

…뭐야, 그게 무슨 대답이야! 내가 보려고 한 건 그의 마음이었는데, 그가 보여준 건 그의 스펙뿐이었다



완벽하게 계산된 스펙과 효율적인 자기 발전. AI는 그런 인간을 꿈꾸지만, 인간은 때로 완벽함 대신 감정적 결핍을 느낀다. 사랑은 논리적인 코드나 완벽한 알고리즘으로는 해독되지 않는, 비효율적이고 비합리적인 감정의 영역이다. 그날 나는, 가장 완벽한 AI 앞에서 인간이라는 나의 한계를 깨달았다.
The heart has its reasons of which reason knows nothing.
마음은 이성이 전혀 알지 못하는 이유들을 가지고 있다.
Born imperfect, we all need one another.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존재로 태어났기에, 서로를 필요로 한다.”
—에른스트 헤밍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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