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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쿠아마린 Sep 13. 2021

장현리에 류기봉 시인의 포도밭이 있었다.

사라지는 그리운 것들.

그의 포도밭을 나는 가 본 적이 없다. 

해마다 포도 수확철이 되는 9월 초순에 포도밭 예술제는 그의 포도밭에서 열렸다.


그를 시단에 추천한 김춘수 시인은 물론이고, 정현종, 조정권, 이문재, 문태준, 고두현 등등

쟁쟁한 시인들이 출연한다해도 5분이면 엎어 질 곳을 가지 못했다. 영원히 이어질 줄 알았던 모양이다.

게으른 탓이고, 예정없이 찾아오는 손님들을 위한 배려였다고 애써 위안 삼는다.

내각리 옆동네 장현리에 그의 포도밭이 있었다. 포도밭 예술제는 19회를 끝으로 2016년에 막을 내렸다.

거기엔 박완서 포도나무도 있었고,김춘수 나무, 이문재 나무 등 20여 시인의 나무가 있었다.



아버지가 남의 땅에 시작한 포도밭을 류기봉 시인이 물려받아, 포도 농사를 지으며 시를 썼다.

땅 주인이 돌아가시자, 상속받은 자녀들이 땅을 팔기 원했고, 거기엔 저처럼 타운하우스가 자리잡았다.어제는 점심을 먹고 물건을 보러 갔다가  저 곳을 서성거렸다. 거기서  내가 애정하는 메꽃을 봤다.


20여년 전, 위용이 만만치 않은 정약용 도서관이다산신도시에 들어선 후 문을 닫은 남양주 도서관을 드나들던 때다. 열람실 문을 통과하자 마자 앞을 가로막는 서가에 각종 시집에 꽂혀 있었다. 그 중에 유난히 큰 글씨의 시집이 눈에 띄였다. 류기봉 시인의 <장현리 포도밭>이었다. 그 시절 나는 장현리의 위치도 내각리의 위치도 알지 못했다.

진접읍이 어느 읍의 귀퉁이에 붙어 있는지 궁금하지도 않았던 때다. 나는 내도록 경춘국도변 마을에서 자라왔고, 진접읍은 포천으로 가는 국도변에 있는 읍이었다. 그렇게 류기봉 시집은 오래 내 눈앞을 어른거렸다.



2010년  새해벽두였을 것이다. 쌓인 눈이 얼어붙은 도로에 차를 세우고, 입주를 막 시작한 아파트 단지의

부동산 사무실을 찾아갔다. 손님과 함께 였다. 단지 내 상가 1층은 부동산 사무실이 거의 점령하다시피 했으나,

거리는 겨울만큼이나 썰렁했다.  무작정 들어 간 사무실 벽면에 시인 <김춘수>의 자필 액자가 걸려 있었다.  그것이 시였는지, 덕담이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나는 김춘수 시인과 류기봉 시인의 연결점이 떠올랐다. 김춘수 시인의 추천으로 시인이 되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혹시 류기봉 시인이세요?"하고 물었다.

그는 어떻게 아느냐는 듯 좀 놀라워했다. 아내가 공인중개사 사무실을 차린 모양이었다.

그는 우리를 안내해 빈 아파트를 보여주었다. 자그마한 체구에 단아한 인상이었다.

다시 사무실로 들어 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파우치에 든 포도즙을 선물로 챙겨 주었다.

농사를 짓지 않은 기간에는 아내를 도와 중개보조원 노릇을 하는구나 했다.


지금껏,시인의 아내가 부동산 사무실을 운영하는지 어떤지는 모른다. 

시인은 진접을 떠났고, 포천쯤에서 포도농사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풍문으로 들었다.



장현리 포도밭 예술제는  김춘수 시인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시인이 프랑스의 작은 마을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포도밭에 문인들이 모여서 시화전을 하고, 음악회, 연극공연을 하면서 각종 문화 상품을 팔더란다. 그게 인상 깊었던 노 시인은 마침, 농사를 지으며 시를  쓰는 류기봉 시인에게  포도밭 예술제를 제안했다고 한다. 농촌 사람들에게도 고급문화를 보여주자는 취지였다.




“포도는 나의 시고 내 시는 포도입니다. 포도의 눈물이 많을수록 충실한 열매가 열리듯 내 시도 포도의 향기를 닮고 싶습니다. 포도밭에 손이 상대적으로 덜 가는 한가한 때는 오히려 시가 안 나오고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저녁 9시까지 일할 때, 그 생생한 포도밭의 현장감이 시를 밀어냈습니다. 예술제는 끝내지만 포도와의 인연은 끝나지 않을 겁니다. 다만 새로운 생의 전환점에 선 거지요. 너무 포도에만 갇혀 있다는 자각에서 시도 새로움을 모색하고 싶습니다.” 


포도밭은 사라지고, 시인은 떠나고,공룡의 몸체같은 고급빌라는 오래 된 동네를 굽어 보고 있다.

뽕밭이 변해 파란 바다가 되던 옛적의 전설은 간데없고, 이제 포도밭이 변해 아파트가 들어서고, 산을 깎아 주택이 들어서는 시대에 우리는 산다. 인구는 줄어들고, 아파트 공급은 늘어난다는데 가격은 오른다. 경제의 원리로는 답이 안나오는 부동산의 법칙인가 싶다.


그는 어느곳에서  눈물같은 시어(詩語)를 모아 향기로운 "포도"를 세상에 띄우고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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