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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 TV속의 아련한 기억(250903)

대한항공, KAL, 비행기, 팝송, 짐 리브스, Anita Kerr

by 브레인튜너

나는 100% 한국인으로 태어났다.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면 어떤 DNA가 섞였을지 알 수는 없지만,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형성된 소위 배달의 민족이니 한민족이니 하는 Ethnic Group에 속하는 건 부인할 수 없다. 이리 보나 저리 보나 나 자신이 한국 사람인 건 사실이다.


태어나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모국어를 한국어로 듣고 말하기 시작했다. 엄마의 뱃속에서 나와 세상의 빛을 보고, 공기를 마시기 시작한 때는 한국전쟁이 끝난 지 불과 15년도 채 지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어릴 적 내 세상은 지금까지 살고 있는 인천 부평구 산곡동으로 미군 관할지였던 Camp Market, 더 정확히 말하면 ASCOM(미군 군수사령부) 주둔 지역과 겹치는 동네였다. 태어난 곳에서 반경 500m 이상을 벗어나 살아본 적이 없다. 여기서는 한국 사람과 다르게 생긴, 그것도 TV 드라마 '전투'나 영화 등에서나 나오는 미국 사람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아버지가 집 다락방에 보관하던 칼러 화보는 일종의 미군 공보지 같은 거였는데, 우리나라의 민둥산, 아스팔트가 깔리지 않은 시골길, 초라하기 그지 없는 초로의 농부 등 당시 어렵고 고통스러웠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었다. 전쟁으로 인한 페허는 어린 아이의 눈에도 비참하게 보였나 보다. 당시 조국祖國 대한민국은 아는 이가 별로 없는 세계의 변방 국가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5천 년 역사 속 우리의 삶에 켜켜이 스며든 문화적인 잠재력은 그 어떤 강한 억압에도 수그러지지 않고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게 오늘날 'K-Culture'라는 타이틀을 만들어준 걸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모국어 실력은 생존 본능을 이어갈 정도의 구사력이 전부였다고 생각한다. 어휘력이 부족하여 사유의 체계 따위를 형성할 수준은커녕, 감정 표현조차 간단하게 표출할 정도였을 거다. 모국어인 한국어 외에 다른 언어인 영어를 처음 접한 건 흑백 TV에서 흘러나온 광고였다. 다른 광고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외국을 자주 다니던 아버지를 김포공항으로 배웅하거나 마중나가는 일이 많아서 그랬는지 대한항공 광고는 잊여지지 않았다. 국민학교 2학년 때 계몽사 컬러학습대백과사전에서 처음으로 본 보잉 747 점보여객기는 그 무엇보다도 최고로 멋진 동경의 대상이었다.


웰컴 투 마이 월드'는 한국 땅에서 태어난 내가 처음으로 기억하는 영어 팝송이다.


대한항공 광고의 배경 음악으로 나오던 노래는 영어로 된 팝송이었다. 당연히 그 시절 팝송이 무엇인지, 영어가 무엇인지 알 턱이 없었다. 그저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멜로디에 홀려서 웅얼웅얼 어설프게 따라서 불렀던 것 같다. 어릴 때 귀에 자주 들려서 그런지 기억 저편에 강제로 저장이 되어 있다. 기억나는 장면은 *고니가 창공을 미끈하게 날아가는 모습인데, 이제야 생각하니 마치 바람이 새를 조심스레 바람에 올려서 데려다주는 느낌이 들었다. 고요하고 차분한 분위기로 온몸을 포근하게 감싸주는 느낌이었다.


*고니: 백조의 수수한 우리말


자료를 찾아보니 원곡은 Jim Reeves가 불렀다. 대한항공은 Anita Kerr Singers가 리메이크한 버전을 광고에 사용했다. 그래서 그런지 짐 리브스의 굵은 톤의 멜로디보다는 더 차분하고 안정된 곡조로 편안하게 느꼈을 수도 있다. 유튜브에서 영상 자료를 찾아보니 80년대 중반에 찍은 컬러 버전밖에 없다. 흑백 TV 방송 시절에 본 광고가 더 기억에 남는데 지금은 볼 방법이 없어 아쉽다.

- 대한항공 예전 로고 -


영어가 낯설던 어린 시절, 뜻은 몰랐어도 노래 첫 소절에 나오는 ‘Welcome to my world’만큼은 정확하게 기억했다. 그 후 한동안 잊고 지냈으나 40대 중반이던 어느 날, 어디선가 이 노래가 귓가를 스쳐 갔다.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mp3 파일을 다운로드해서 수십 번을 넘게 반복해서 들었나 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반가움 때문이었을까. 지금도 외출할 때면 지하철에서 이따금 7080 추억의 팝송을 듣는다. 이 노래는 재생 목록 맨 위에 있다. 파일 이름을 Anita Kerr Singers 로부터 저장해서 그렇다.


말이 필요 없는 추억의 명곡이다.


이제는 영어 좀 한다고 귀에 잘 들린다. 그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가사는 신약성경 마태복음 7장 7절에서 따온 가사다. 다음 첫 줄부터 셋째 줄까지의 내용이다.


Knock and the door will open

Seek and you will find

Ask and you'll be given

The key to this world of mine”


노래 가사는 성경에 기록된 순서와는 다르다. 영어 성경 King James Version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성경의 순서대로 불러봐도 음률에는 큰 영향을 미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양보 표현을 좋아하는 영어의 특성에 맞추었나 보다.


“Ask, and it shall be given you;

seek, and ye shall find;

knock, and it shall be opened unto you:”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산다는 말이 있다. 40대 중반까지만 해도, 뭔가 하면 될 것 같다는 진취적인 생각으로 자신을 못살게 굴며 살았다. 소위 자기개발이니 자기계발이니 하면서 스스로 가스라이팅을 한 건 아닌지.... 이제는 무엇을 하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차분히 정리하면서 주변을 돌아보고 싶은 생각을 더 하는 나이가 되어가나 보다. 마치 망각의 길목에서 아직도 건너지 못하고 무의식의 심연에서 건져내주기를 바라는 기억이 가슴에 따뜻한 온기를 남기려는 발버둥인지도 모르겠다.


들으면 얼음장 같던 마음을 녹여주는 노래, 인생의 온갖 풍파를 잠시라도 잊게 해주는 노래가 명곡이 아닐까 한다. Welcome to My World의 노랫말처럼 근심 걱정을 모두 내려놓게 하는 멜로디와 가사가 안식처처럼 다가온다.




전체 가사는 어려운 단어나 표현이 없어서 학습하는데 어렵지는 않다.

Welcome to my world

Won't you come on in?

Miracles, I guess

Still happen now and then

Step into my heart

Leave your cares behind

Welcome to my world

Built with you in mind

Knock and the door will open

Seek and you will find

Ask and you'll be given

The key to this world of mine

I'll be waiting here

With my arms unfurled

Waiting just for you

Welcome to my world


Waiting just for you

Welcome to my world


여기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어서 오세요

기적은 아직도

종종 일어나고 있지요

내 마음이에요

근심 걱정 모두 내려놓고

당신을 위해 준비한

이곳으로 오세요

두드리면 문이 열릴 거예요

원하는 건 뭐든 얻을 거예요

말하세요 여기로 들어오는

열쇠를 드릴게요


두 팔을 크게 벌리고

여기서 기다릴게요

당신만을 기다려요

오신 걸 환영합니다.

(안선형 번역)


추신: 예전에 올린 글 https://brunch.co.kr/@clearthinking/204/write 을 새롭게 고쳐서 쓴 글이다.


▶ 흑백 광고 아카이브를 찾을 수 없어서, 유튜브에 있는 배경음악만 같은 CM을 올렸다.

https://youtu.be/eI2G8T6pbko?si=H8JH4fpWvPfg0x5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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