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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나혜 Aug 22. 2024

못된 딸내미

  아빠를 차단했다. 더는 아빠를 볼 용기가 없다. 아빠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감이 오지 않아 마음이 무겁다. 나를 미워할까? 원망할까? 미안해할까? 슬퍼할까? 수많은 물음이 꼬리를 물고 늘어진다. 이러다 안 되겠다 싶어 생각을 돌릴 겸 책을 폈다. 책을 읽던 중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책에 적힌 문장을 읽다가 아빠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사회의 본질적인 문제를 개혁해야 할 국가는 재정 부담을 내세워 사회적 부양의 몫을 개인에게 전가해 왔다 ··· 모든 문제의 주범이 나이 든 세대의 탐욕인 것처럼 취급되어 버렸다.’

<국민연금 가치선언> 중      


#1

  아빠의 ‘효도’가 필요한 일이라는 걸 납득했을 때부터, 아빠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왔다. 아빠의 누나들은 아빠에게 ‘오지라퍼’, ‘극성’이라며 자주 아빠를 비난했다. 아빠는 그에게 붙여진 별명답게 늘 할머니,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를 챙겼다.      

  나 또한 그의 ‘효도’가 불편했다. 아빠의 ‘효도’에 엄마의 희생이 따르기 때문이다. 둘의 노동 강도를 비교하는 시도는 어느 정도 무리가 있지만 아빠의 노동보다 엄마의 노동 강도가 더 심했다. 예를 들어, 아빠가 할머니 집 지붕을 수리할 때, 엄마는 하루 종일 할머니 집 부엌에서 요리와 설거지를 하고, 남는 시간에 청소를 했다. 지붕 수리를 끝낸 아빠는 피곤하다며 누워서 낮잠을 잤지만 엄마는 저녁 설거지를 마친 이후에나 퇴근할 수 있었다. 나는 동등하지 않은 이 상황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아 ‘효자 아빠’를 미워했다. 


#2

  한편, 건강하지 않은 방식임에도 아빠의 ‘효’를 비난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누군가 그들을 돌보지 않는다면 그들은 시설에 가야 했다. 대다수가 그들을 시설에 보내야 한다고 말했다. 아빠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화를 내며 결사반대를 외쳤다.

  어느 날 아빠는 할아버지와 함께 노인정에 다녀온 후, 내게 중요한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엄청난 사실을 발견한 것처럼 눈을 반짝였다. 그가 알아낸 사실은 “우리 모두 노인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 말을 여러 번 반복하며 주장했다. 귀가 먹먹해지고, 말이 헛 나오고, 거동이 느리고, 대화가 안 되더라도 무시하지 말고 '함께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는 그날 노인정에서 자신의 아버지가 동네 사람들과의 대화에 끼지 못해 홀로 술잔을 기울이는 풍경을 봤을 테다. 그는 그날 집안에서 꼼짝없이 앉아 TV를 시청하다 잠에든 어머니를 봤을 테다.     


  한 번은 외할아버지와 외식을 하던 중 아빠가 외할아버지에게 뜬금없는 말을 했다.

  

  “아버님, 버스 탈 때 누가 돈 안 낸다고 뭐라 하거든 당당하게 말하세요. 이거 다 내가 열심히 키운 자식들이 낸 돈이다! 이렇게요. 주눅 들 거 하나 없어요”


  외할아버지는 하루에 여러 번 버스를 타고 산책을 다니신다. 대전은 만 70세 이상 노인에게 무임교통카드를 사용하도록 한다. 아빠의 뜬금없는 요구에 외할아버지는 “그럼 그래야지, 고맙네 박사위” 하면서 허허허 웃으셨다.      


#3

  아빠는 불안했던 것이다. 내가 나의 미래를 불안해하듯 아빠도 아빠에게 곧 닥칠 미래를 불안해했다. 아빠의 불안은 일상에서도 잘 드러났다. 여행 한번 갈 때에도 아빠는 함께 사는 외할아버지와 자신의 부모에게 미안해하며 여행을 주저했다. 폐차 직전의 차를 몰면서 새로운 차를 구입하지 않는 이유는 다름 아닌, “그 돈으로 부모님들 여행이라도 한 번 더 보내 드린다”는 고집 때문이었다. 

  그의 불안은, 부모가 언제 돌아가실지 모른다는 불안이기도 했지만 자신도 곧 노인이 된다는 불안이기도 했다. 내가 불안정한 환경 속에서 스스로를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 불안을 느끼듯, 아빠는 우리의 부모들을 책임져야 한다는 의무감에 불안을 느꼈다.      


#4

  ‘너네 아빠는 왜 이리 극성맞냐’ 던 고모들의 물음에, “그러게 말이에요”를 일관하던 나는 어느 순간 마음속으로 다른 대답을 하고 있었다. 아빠의 극성이 빠진 자리를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엄마의 희생이 멈춘 자리를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아빠의 ‘효’와 엄마의 ‘희생’을 나란히 두고, 같은 것으로 여길 수는 없다. 그러나 아빠의 ‘효’와 엄마의 ‘희생’이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건강하든 건강하지 않든, 나는 그들에게 함부로 ‘멈출 것’을 요구하지 못한다. 부모 돌봄을 위해 그들이 십 년 넘게 맞춰오던 나름의 합을 깨뜨리고,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할 기력이 내게는 없다. 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 역할을 고민하다 보면 온몸에 힘이 빠지기 일쑤다. 그래서 일이 더 많아 보이는 사람에게로 가서 그를 돕거나, 조부모님들께 안부전화를 하는 것이 나로서는 최선이다. 무엇보다 그들이 멈추면 당장 할머니와 할아버지, 외할아버지의 삶은 송두리째 바뀐다.      

  

  엄마의 '희생'을 떠올리면 ‘효’를 중시하는 아빠가 미울 때가 많다. 동시에 그의 진심을 알기에 쉽게 미워할 수 없다. 노인의 삶을 관찰하고, 자신의 삶처럼 불안해하며 깊이 슬퍼할 줄 아는 아빠가 밉지 않다. 슬픈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글을 썼는데, 글을 쓰다 보니 마음이 아려온다. 하나 다행인 건, 차단을 하면서 아빠에게 ‘내가 아빠를 많이 좋아한다’는 말을 전했다는 점이다. 내 마음이 언제 괜찮아질지는 모르겠지만 그때까지 아빠도 나를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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