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있었던 2심 판결에서 유죄가 나왔다. 무기박람회에서 분쟁지역에 무기를 팔지 말라며 탱크 위에 올라갔던 우리의 퍼포먼스가 업무 방해에 해당하는 추상적 위험으로 볼 수 있다는 거였다. 1심에서는 예상치 못했던 무죄가 나와서 뛸 듯이 기뻤는데, 2심에서는 또다시 예상치 못한 결과로 기운이 쭉 빠져버리고 말았다. 학살국에 무기 팔아서 돈을 버는 건 국위선양이자 보호받아야 할 업무이고, 거기에 저항하는 5분 남짓의 퍼포먼스는 ‘방해’라니. 폭력에 찌들어버린 세상의 뻔뻔한 낯짝을 마주할 때면, 나는 속이 뒤틀린 것 같이 메스껍다.
집에 돌아와서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유죄 소식을 전하며 다시 벌금형이 내려졌다고 징징거렸다. 그런 나에게 아빠는 말했다.
“기분 나빠하지 마. 그거 별 거 아니야. 벌금 그까짓 거 아빠가 다 내줄 테니까 쫄지 마.”
작년 한 해 동안 시민들이 십시일반 모아주신 기금이 있기도 하고, 벌금의 액수 때문에 기분이 나빴던 것도 아닌데, 아빠가 건넨 말이 마음을 뜨끈하게 물들였다. 쫄지마. 그 말 한마디에 ‘상고심에 간다 해도 이길 수 있을까’하며 쭈그러들었던 마음이 스팀에 닿은 옷깃처럼 빳빳하게 펴지는 것 같다.
나와 함께 재판을 받은 일부 동료들은 가족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선배 세대 활동가들이야, 집시법이니, 업무방해니 법적인 공방을 워낙 여러 번 겪기도 했고 병역거부한 동료들 같은 경우엔 수감생활도 1-2년 하기도 했으니 이번 재판은 그렇게 큰일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들도 20대 때는 부모님 속을 많이 썩였다고 했다. 그런 몇몇 동료들과는 다르게, 우리 가족들은 나의 재판을 그리 대수롭게 여기지는 않았다. 엄마는 나를 두고 ‘성질 더럽다’며 혀를 몇 번 차기는 했지만, 본격적인 재판이 시작되고 나서는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나를 지지했다. 1심 변론기일에 출석하던 날, 엄마는 ‘지금의 전쟁을 보고 있다면, 니가 한 짓은 하늘에 우러러 결코 잘못이 아니야’라고 문자를 보냈다.
살면서 엄마와 아빠의 이해를 받지 못해 서러웠던 시간들이 나에게도 종종 있었지만, 그래도 활동에 있어서만은 그들의 이해를 애써 구하지 않아도 된다는 데 감사한 마음이 들곤 한다. 유서 써놓고 집을 나서거나, 수감생활 끝에 신분에 빨간 줄이 긁히기도 했던 그들의 20대 시절에 비하면 나는 얌전해도 한참 얌전한 일상을 살고 있는 거니까. 무엇보다, 내가 왜 탱크에 올라가야 했는지 설명하지 않아도 그들은 알고 있을 거라는 사실이 마음을 든든하게 했다.
엄마와 아빠는 20대 때 학생운동을 하며 만났다고 했다. 그 시절 엄마는 노동운동을 하다 여러 번 수배생활을 했고, 아빠는 대학 때 캠퍼스를 점거한 채 시위를 하다 붙잡혀 서너 달 감옥생활을 했다. 엄마는 그때 아침에 눈을 뜨면 밤 사이 사람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을까 봐 눈을 뜨기가 싫었다고 했다. 아빠는 이제 더 이상 그 시절의 이야기는 좀처럼 하지 않지만, 그때 그를 절망하게, 혹은 분노하게 만드는 압도적인 무언가가 있었으리라. 그들은 그렇게 분노와 절망의 시대에 맺어졌지만, 그 분노와 절망은 그들의 삶 마저 압도해 버려서, 아빠는 절망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동굴에 처박혀버렸고, 엄마는 불같은 분노를 안고 삶을 이겨내야 했다.
엄마는 툭 하면 우는 사람이었다. 엄마를 따라 집회나 시위에 가면 어떨 때는 엄마가 목을 놓아 펑펑 울어버려서, 그 옆에서 어쩔 줄 몰라 했던 적도 여러 번이다. 엄마는 종종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를 그리워한다. 철거싸움을 하다 다쳐, 편치 않은 몸으로 아파트 공사장에서 일하던 중 추락해서 돌아가셨다던 외할아버지. 누군가의 억울한 죽음을 마주하는 엄마의 마음속에선 늘 할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는 버튼이 눌리는 것 같았다. 상처받은 살갗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로 집회에 앉아있는 엄마가 때로는 안쓰럽다가도, 이내 눈물을 훔치고 구호를 외치거나 계좌번호를 꾹꾹 눌러 후원금을 내는 그의 눈빛에 결연함이 서려 그게 세상 든든하기도 했다. 고통을 겪은 살갗은 폭풍이 지난 뒤에도 늘 폭풍을 살게 하지만, 그 속에서 예민하게 발달한 촉각은 타인의 슬픔을 끝내 읽어내며 곁이 되어주기도 한다는 것을, 나는 엄마를 보며 알았다.
엄마가 어느 날 내게 말했다.
“민영아, 어떤 싸움은 해보는 것만으로도 이기는 거야.”
내가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였다. 거대한 폭력을 마주하면, 제대로 대면도 해보기 전에 다리가 덜덜 떨려 도망가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나 다리를 덜덜 떨면서도 해야 할 말을 세상에 뿌려내는 것과 아닌 것은 천지차이일 거다. 너무 두려웠던 그 싸움을 나는 울면서도 해보았고, 결과가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는 사실은 그나마 이 땅에 발 붙이고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고 있다.
이번 싸움도 비슷할 거다. 무죄고, 유죄고, 벌금이 얼마고, 그런 것들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거라는 걸 안다. 내가 사는 이 세상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며 어마무시한 돈을 버는 그런 세상이니까. 가자지구에서의 학살을 실시간으로 목격하면서도, 모두의 일상이 아무렇지 않게 굴러가고 있다는 게 가끔은 너무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 그런 걸 생각하면 내가 살아서 숨 쉬고 있다는 사실마저 견딜 수 없어 몸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이 기분에서 도망칠 수는 없으니까, 잔잔한 수면 위에 모래알이라도 하나 던져보는 심정으로 일단은 버텨본다.
그리고 곁을 본다. 가족들과 친구, 동료들.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 탱크 위에 올라가거나, 십시일반 기금을 모아준 사람들, 쫄지말라는 당부를 전해준 이들이 곁에 있다. 마음속에 슬픔버튼 하나씩 지니고 사는 사람들이 곁에 있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슬픔을 읽어내는 촉각은 고통을 가져다주지만, 결코 가만히 있게 하지는 않는다. 아파서 꿈틀, 쓰려서 꿈틀. 그런 싸움들 속에서 일단 펑펑 울어본다. 그럼 다시 나아갈 힘이 생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