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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환 Oct 16. 2020

[독서노트] 우울한 날엔 니체

(발타자르 토마스 지음, 김부용 옮김, 자음과모음)


니체에 대한 짧은 생각 1


2016년, 상근예비역으로 복무하던 때 주말을 이용해 '니체 학회' 정기모임에 참여했다. 내가 다니던 교회의 아는 동생이 내가 철학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자기네 대학에서 열리는 학회 리플릿을 내게 건넸던 것이다. 그럼에도 당시 니체에 대해 아는 것은 '신은 죽었다' 한 구절뿐이었다(사실 그마저도 원본의 앞뒤 맥락을 마음대로 잘라먹은 구절이지만). 그 기회에 니체에 대해서도 알고 오랜만에 대학교의 정취 같은 것도 느끼고 싶었다. 너무 많은 걸 기대했던 탓인지 정작 장내 분위기는 지나치게 숙연했다. 열띤 토론 같은 것은 없었다. 하지만 기조연설을 하던 교수부터 발제자들 모두 나직하면서도 힘 있는 목소리로 발제문을 읽었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위버멘쉬('자신'을 능가하기를 영원히 반복하는 니체 철학에서의 이상적 인간)나 영원회귀(매 순간은 인간의 능동적 의지와는 달리 수동성을 띤 똑같은 형태로 다시 찾아온다는 개념) 등과 같은 생소한 어휘가 마음속에서 막 자아내는 호기심을 만끽했다. 특히 정낙림 발제자가 니체의 '놀이(유희)'사상에 집중하여 소개한 부분을 접하고 큰 흥미가 생겼다. 부끄럽지만 당시 내가 끄적이던 글에 어떻게든 그 부분을 엮어 넣으려고 한 흔적이 서툴게나마 <물 위에서 시간을 노래함>이라는 글로 남아있다.


영원히 동일한 무구함 안에서 최소한의 도덕적 양립 가능성도 없이 성립하는 생성과 소멸, 구축과 파괴는 이승에서 예술가와 어린아이들의 놀이를 구별한다. 예술가와 어린아이가 노는 방식과 동일하게 영원히 살고 구축하고 파괴하는 불이 이 무구함 속에서 작용한다. 바로 이 방식으로 아에온은 불을 가지고 노는 것이다.
- <그리스 비극 시대의 철학 7>, p.282 재인용


되돌아보니 다른 곳도 아닌 교회에서(!) 처음 니체 얘기가 오갔다.


니체에 대한 짧은 생각 2


대학 1학년 때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을 읽었다. 내용이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한 청년이 노학자에게 찾아가 '아저씨, 세상이 왜 이래' 하는 식의 하소연을 하자 노학자가 꺼낸 처방이 아들러니체였던 듯하다. 기숙사 룸메이트의 책꽂이에서 우연히 발견하여 며칠 빌려달라고 부탁했다. 그 책은 어디까지나 상담가의 관점에서 쓰여 현학적이지도 않고 쉽게 읽을 수 있었다. 자신이 스스로 무엇을 욕망하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아무에게도 속박받지 말라, 대략 요지는 이랬다. 물론 논란이 많은 책이기도 하고 개인적으로도 맨 끝에 '으레 쓰여있을 답'이 예상되는 도서는 별로 안 좋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용된 니체의 말, 또는 그의 영향을 받은 아들러의 말을 통해 니체가 어떤 인간관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목적에 따라 수단을 만드는 인간이 아닌 목적을 선택하는 인간, 행복을 특정 조건 아래 두지 않고 그 조건을 스스로 만드는 주체 등...


행동함으로써 하지 않는다. '이것 하지 말라', '단념하라', '자신을 극복하라' 이렇게 말하는 모든 도덕은 내게 근본적으로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반대로 어떤 일을 하도록 나를 자극하는 도덕, 그것을 되풀이해서 하게 만드는 도덕, 아침에는 그것을 행하고 저녁에는 그것에 대해 꿈꾸게 하는 도덕, 그것을 잘하는 것 말고는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게 만드는 도덕, 또한 오직 나만이 그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도덕에 끌린다.
- <즐거운 학문 4>, p,173 재인용


니체에 대한 짧은 생각 3


   나와 절친한,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동아리 동생이 이전과는 달리 딴 사람이 되어 있었다. 놀기 좋아하는 기질은 어디 가진 않았지만, 이따금 내게 "인생이 왜 부조리할까요" 같은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또한 이 친구가 작심하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1, 2학년 때도 시를 습작하곤 했더랬다. 그런데 복학 후 완성본이든 미완성본이든 써서 내게 보여준 산문들엔 어딘지 예전 같지 않은 깊이가 있었다. 사석에서 진지하게 얘기하듯 "부조리한 인생일지라도 정면으로 부딪히며 살았다면 이루지 못한 가능성에 미련은 없을 것"이라던지, "나 자신에 부여하는 도덕이 결국 어떤 신도 줄 수 없는 '내게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라던지 는 말들을 문장들 사이로 볼 수 있었다. 성숙했다기엔 본래 얼굴을 찾은 듯 자신 있어진 그의 모습에 내심 감탄하는 한편, 혹시 얼핏 어디서 들은 듯한 "위버멘쉬"가 되길 꿈꾸는 건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때 내게 자취방 조그만 책장에서 책 한 권을 꺼내 읽어보라며 건넸다: <우울한 날엔 니체>


모든 것이 필연적이라면 내가 행동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과 믿음은 다른 모든 무게 옆에서 그보다 더 무겁게 너를 짓누르는 무게다. (...) 네가 하고 싶은 모든 것에 관한 질문이 성립한다. '나는 이런 식으로 이것을 무한히 하고 싶은가?' 이 질문은 가장 무거운 무게다.
- <유고(1881) 11> pp.294~295 재인용





다른 철학자들의 책은 내가 직접 찾아서 읽게 되는 데 반해, 니체는 항상 우연한 기회에 만나게 되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문학이론서를 읽을 때마다 각주에 늘상 쓰인 '바흐친(Bakhtin)'을 보는 느낌과는 다르다. 니체를 마주치기 전엔 항상 어떤 계기가 있는데, 늘 무언가가 부족한 상태였던 것 같다. 니체 학회 모임에 참석했을 당시엔 대학 입학과 동시에 군 입대를 하게 되어 학교에서 친한 동기도 선배도 없이 겉도는 신세였다. <미움받을 용기>를 읽을 당시에는 교외 교내 할 것 없이 인간관계에 대한 욕심으로 여러 활동에 참여하다 보니 점점 인간관계에 되려 거품이 생겨가던 때였다. 그리고 동아리 동생이 복학해 돌아왔을 때는 갑자기 터진 코로나 사태에 너도나도 각자 섬에 갇힌 로빈슨 크루소 마냥 살기 시작했을 때였다. 그래서인지 '니체'라는 이름이 참 친근하다.


이 책이 여타 자기 계발서와 다른 점이라면 주제가 되는 '텍스트로서의 니체' 위에 저자의 관점을 전제하고 그 근거를 니체에서 찾아대는 식이 아니라는 점이다. 니체 읽기를 위한 입문서라고 해도 될 만큼 니체의 짤막한 글들을 통해 귀납적으로 니체의 사상에 접근하고 있다. 사회구조가 사람들의 생활 조건을 결정짓는 점을 무시했다는 비판을 받는 철학자이지만, 사실 이런 비판도 그 사상을 일단 이해하고 난 뒤에야 가능할 것이다. 표지와 각 장 제목들처럼 '우울한 날'이라던지 '집단에서 벗어나라'던지 하는, 독자가 처해 있을 특정 상황은 가정돼 있다. 다만 이 책은 매 순간의 상황들에 정면 비판이나 설득 방식을 취하지 않는다. 관련된 니체의 텍스트를 인용하고 그 자체에 대해 해석해 줄 뿐이다. 그럼으로써 독자에게 능동적으로 니체 사상을 찾아낼 길을 열어준다.


출판사 '자음과모음'에서 출간한 필로테라피(philo-theraphy) 전집


아마 1년 전의 나였다면 철학 치료(philo-theraphy)라는 시리즈와 그중 한 권으로 나온 이 책에 많은 반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추상적이고 복잡한 철학 이론들이 현대 일반인과 점점 괴리되고 있는 현실이다. 야콥 브로놉스키는 지식이란 새로운 패러다임을 수용하면서 존속한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사상이라는 것 또한 여러 가지 보편적 방식으로 응용되어야만 새로운 해석 과정이 수반될 것이다. 또 그러한 반복을 통해 인간사회에서 존속할 수 있을 것이다. 우울이라는, 어찌 보면 살면서 한 번씩 깊게 겪는 증상을 통해 낯선 철학자의 사상을 살갗에 닿듯 가까이 느끼게 하는 책, <우울한 날엔 니체>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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