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핀 Jan 28. 2021

#2. 마음이 힘들다는 것은

‘배려'와 '이기적', 멀지만 가까운 두 단어


스스로 마음이 힘들다는 걸 깨닫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단순히 ‘오늘 기분이 별로다’ 이런 느낌이 아닌, 마음이 지치고 힘들어서 헤어 나오기가 힘든 순간 말이다. 우리는 힘든 순간들이 찾아올 때마다 이겨낼 수 있다고 다짐하지만, 언제나 새로운 순간들이기에 다짐과 달리 흘러가곤 한다.


누구나 힘든 일이 생기고, 그 힘듦은 개인의 판단에서 비롯된다.

나에게는 견디기 버겁고 때로는 나약해지는 순간일지라도, 다른 누군가에게는 고민거리조차 되지 않을 때가 많다는 의미이다. 더군다나 소중한 사람들에게 나의 우울을 전가하여 영향을 끼치고 싶지 않다면, 주변 사람에게 털어놓는 일은 점차 줄어들게 된다. 그들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일종의 배려 차원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스스로 문제점을 알고, 해결방안을 찾고, 마침내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 오랜 나의 가치관이자 습관이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

과연 내가 생각한 배려라는 행동이, 그들에게도 배려로 다가왔을까?

그렇다면 과연 스스로 해결하고 극복하는 것이 성숙하고 단단한 인간이 되는 길이 될까?


나는 여전히 몇몇 순간의 우울함을 스스로 극복하고자 했다. 혼자 문제를 깨닫고 해결한다면 조금 더 성장한 인간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당시 니체의 철학은 내게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고통과 악을 극복할 수 있는 궁극적 방안은 '고통과 악을 자신의 삶과 힘에의 의지의 고양을 위해서 긍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인간이 되는 것'이라는 니체의 말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으로서의 성장과 발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결국,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지상의 '운명'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며 사랑하는 자가 바로 강한 인간이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니체의 주장은 주어진 상황 속에서 스스로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하여 성장의 발판으로 만들자는 나의 오랜 가치관과 일맥상통했다. (니체의 철학을 나의 방식으로 해석한 것이니 니체가 정확히 말하고자 한 바와 다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최근 이상하게도 마인드 컨트롤이 되지 않고, 나의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책하는 일들이 생겼다. 지금까지는 힘든 순간들이 곧 내가 변화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라고 여기며 스스로 극복하겠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계속해서 무언가 나의 의지와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으니 정말 버겁고 마음 한편이 지쳐가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겹쳐지면서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들이 찾아왔다. 정말 처음으로 마음이 힘들었다.


힘든 시기가 다 지나서야 주변 사람에게 넌지시 이야기하면, 왜 스스로를 더 힘들게 만들었냐는 물음을 돌아올 때가 있었다. 오히려 나를 진심으로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혼자 끙끙 앓고 있는 내 모습이 더 큰 걱정으로 다가오기도 했던 것이다. 그들은 도리어 내가 힘든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털어놓기를 진정으로 바라고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나의 힘듦을 타인에게 말함으로써 나는 위안을 얻고, 반대로 타인에게는 걱정을 가져다주는 것이 매번 참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했었고, 그걸 명분으로 고민을 혼자서만 간직했었는데 말이다.

그래서 순간 다른 것을 느꼈다. 나의 배려는 내 관점에서의 배려였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리고 나의 배려라는 것에만 집중한 나머지 스스로 더 힘들게 만들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알고 보면 누군가에게 약간은 의지하고 싶어 하고, 솔직하게 지금 많이 지쳤다는 것을 표출하고 싶은 게 나의 진심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게 오히려 한 인간으로서 성숙하고 단단하게 거듭나는 계기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적어도 그것이 바로 나의 감정을 인정하고 스스로 솔직하게 고백한 멋있는 행동이지 않은가. 누군가를 위한 배려라는 명목으로 진심을 다 숨긴 채 지낸 것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과연 누구를 위한 배려였으며, 무엇을 위한 배려였을까? 결국 나의 배려는 나를 위해서도 아니었고, 남을 위해서도 아니었던 것이다.

언제나 타인에게 솔직해지는 것이 내게 어렵게 다가왔던 이유는 모두가 다른 생각을 지니고 있기에 나의 마음을 온전하게 공감받을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람이 느끼는 지치고 힘든 혹은 우울이라는 감정에 크고 작음이 어디 있으며, 힘듦의 기준이 정해져 있는 것 또한 아니지 않을까. 더군다나 같은 공간에서도 모두가 다른 상황에 처해있고, 같은 상황일지라도 다른 감정을 갖게 되며, 다른 방식으로 나아간다. 그렇기에 상대방을 전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이론적으로만 가능할 뿐, 현실에서는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누군가의 100%의 이해를 바라고 나를 털어놓는 것이 아니라, 그저 누군가의 존중을 기반으로 한다면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지도 모르겠다. 


마음이 힘든 순간에 나는 배려가 항상 '이타성'과 맞닿아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경험했다. 때로는 이기적인 배려가 표출되기도 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렇기에 우리는 배려를 무조건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지점을 지나, 배려의 이면을 살펴보아야 하는 시기에 도달했다고 본다.

작가의 이전글 #1. 인정과 칭찬, 그 뫼비우스의 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