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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팬지 May 26. 2023

흐린 하늘을 보고 싶어

어느날이든 살아있다면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방법은 폐를 이식하는 방법 밖엔 없어요.” 

주치의는 점심 메뉴를 얘기하듯 한다.

 “이식할 수 있을까요?” 

엄마는 희망을 붙든다. 

“그런데...”

의사는 언제나처럼 꼬리를 흐린다. 

“폐 이식을 기다리는 사람이 많아요. 기증자도 나의 폐를 누군가가 받아서 오래 잘 사용해 주기를 바랍니다. 여러 조건을 충족시키는 환자에게 이식이 결정되는데 주영님은 수술받는다고 해도 건강하게 회복될 가능성이....” 

잠시 가슴에 서늘한 바람이 인다. 엄마의 눈빛이 슬픔으로 잠겨 들어간다.


“널 살고 싶게 만드는게 뭐니?”

 언니는 머뭇거리며 묻는다. 막 엄마에게 폐 이식 얘기를 듣고서였다. 

그 말엔 ‘넌 걷지도, 숨 쉬지도, 아무 경험도 할 수 없는데 도대체 왜 살고 싶은 건데?’가 생략되어 있다. 나도 궁금하다. 왜 삶에 이렇게 집착하는 건지. 온몸의 살이 뼈에 들러붙어 징그러운 힘줄이 다 드러나고 폐가 망가져 산호호흡기에 의지하고 있다. 골수 이식 후 갖가지 숙주 현상으로 매일 밤 잠을 자지도 못하면서 왜 살고 싶은 거지? 조금 전에도 마시던 물이 기도에 들어가 숨을 쉬지 못해 죽을 것 같았다. 그런데 살고 싶다.


살갗을 찌르는 바늘에 감각이 없는지 오래다. 몸무게는 36킬로그램을 1년 전에 찍었고 통통해서 감추고 싶었던 팔뚝은 가죽만 남아 감추고 싶다. 눈이 침침 하지만 눈물이 나지 않는다. 휠체어를 타지 않고 나갔던 마지막 외출은 5년 전이다. 


나에겐 ‘마지막’이 많다. 마지막으로 새우를 먹으며 소주를 마셨고, 마지막으로 벚꽃이 흩날리는 모습을 보았으며 마지막으로 엄마의 얼굴을 보며 엄마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다. 아니, 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다.


눈꺼풀이 너무 무거워 들어 올릴 수 없다. 입을 열어

 “나 괜찮아. 편안해. 걱정하지 마.” 

얘기하고 싶다. 입을 열 힘이 없다. 손을 들어 엄마의 얼굴을 만지고 싶은데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나의 마지막 모습이 될 것이다. 빛이 느껴진다. 마지막 빛.




언니! 내 장례식에서 엄마를 잘 챙겨줘 고마워. 엄마가 오래 슬퍼하지 말아야 할 텐데. 오늘은 날씨가 많이 흐리다. 옛날 잠시 사귀었던 남자가 시를 선물 해 준 적이 있었어.

‘싱그러운 유월의 장미는 칠월을 열기에 충분했고...’

어떤 외국 시인의 시를 패러디 한 거였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내가 지금까지 이 구절만 기억하는 걸 보면 꽤 감동 이었나봐. 빨간 장미가 뒤덮인 유월이 내 세상의 마지막이 되었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건 우연이었는데. 무한대로 넓은 우주에서 생명이 있는 곳은 지구가 유일한 행성이래. 로또 맞을 확률보다 훨씬 힘든 확률로 내가 이 지구에 왔잖아. 얼마나 빤타스틱한 일인지. 나 하고 싶은 거 정말 많았는데. 새해가 되면 다이어리 첫 장마다 버킷리스트를 적고는 했는데 몇 가지나 했는지 모르겠다.


가장 잘한 건 아프기 전에 엄마와 언니, 우리 세 식구 제주도에 다녀온 일이야. 그것마저 없었다면 엄마에게 아픈 나만 남았을 거야. 난 그다지 나쁜 사람이 아니었는데 서른두 해를 넘긴 내게 왜 골수암이 왔을까? 

모든 일은 그랬어야만 했다고 생각했었어. 내가 이런 병에 걸린 것도 그래야만 했을까? 뭘 위해서?


 ‘그래야만 했다’는 말엔 당위성이 보여. 세상일이 모두 당연한 건 아니잖아. 그런데 난 당연하다고 생각했어. 내가 아프기 전에는. 그런데 아니더라. 당연한 건 없어. 당연하다는 건 너무 슬퍼. 어떤 사건이 그냥 일어날 수도 있는 거야. 송화가루가 통통히 오른 소나무가 오월을 불러오고, 어제보다 쑥쑥 자란 풀이 소박한 꽃을 피워내는 것처럼, 그냥 오는 거지. 생명이 사는 일에 너무 많은 의미와 목적을 부여하려 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더 힘들었나 봐. 그냥 내 병도 무심히 온 거야. 그런데 죽은 지금도 그냥이라고 인정하기 힘들어. 뼈밖에 남지 않는 쓸모없는 몸, 걷지도 못하고 맛있는 음식도 못 먹는 몸에 다시 들어가고 싶어. 난 그냥 아름다운 세상을 더 보고 싶었어. 내 오늘이 내일을 열기에 충분하도록. 시간은 기억이 쌓여 만들어지는 거래. 내 기억은 이제 끝이다. 


살아서 흐린 하늘을 보고 있는 언니가 너무 부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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