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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수아 Feb 26. 2023

분리불안장애

"육아에 지친 엄마는 잠시 아이와 떨어져 있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이웃집에 아이를 맡기고 조금이라도 휴식을 취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죠. 그런데 아이는 엄마의 그 마음을 본능적으로 압니다. 엄마의 마음 상태에 맞게 엄마를 덜 힘들게 하면 좋으련만, 아이는 오히려 엄마가 싫어할 행동을 골라하며 엄마를 더 지치게 하고, 심지어는 엄마에게 아이를 미워하는 마음까지 생기게 만듭니다. 잠시 떼어놓으려는 엄마, 엄마와 절대 떨어지지 않으려고 울며 발버둥 치는 아이..."


언젠가 TV에 나오는 심리 전문가의 말을 듣고 우리 시어머님을 떠올렸다. 그랬구나, 그런 거였구나....


신혼여행을 다녀온 첫날부터 시작된 세 사람의 결혼생활!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나는 정말 용감했다. 세상 사람들은 다 좋아 보였고,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사는 곳이 이 세상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시어머님을 모시고 사는 데에 두려움이 1%도 없었다. 형님이 '어머님을 못 모시고 살겠다'고 선포를 했다는 소리를 전해 들었어도, 그건 단순히 사람과 어울리는 걸 좀 싫어하는 분의 선택이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난 학교에서도 연세 많은 선생님들과 친하게 지냈고, 그분들께 많은 사랑을 받던 후배 교사였다. 난 연세가 많은 분들을 좋아했다. 젊은 사람들보다 이해심이 많고 지혜가 많은 분들이라고 스스로 단정 지었는지도 모르겠다.


방 두 칸에, 거실에 햇볕도 들어오지 않는 전셋집에서 살았지만, 난 재미있게 신혼생활을 하고 있다고 믿었고, 우리 세 사람은 그런 마음으로 평생을 함께 살게 될 줄 알았다. 모시지 않겠다는 큰며느리와 평생 모시고 살겠다는 작은며느리, 어머니는 당연히 나를 이뻐하시고 좋아하셨다. 결혼 후 얼마 되지 않아 형님네서 어머님의 충격적인 독설을 들었다. 형님의 맏아들이 그 당시 초등 1학년 생이었는데, 수학 숙제를 하다가 모르는 게 있으니 자기 엄마에게 물었다. 그 순간 어머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니 엄마가 그걸 알겠냐? 학교 선생님인 작은 엄마에게 물어봐야지."


난 그 순간 형님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다. 그 놀라움이 너무나 커서 그 사건이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형님은 대학을 나오지 않은 분이셨다. 그 일이 있고 좀 지나서 형님은 내게 속마음을 털어놓으셨다.


"동서, 난 말야. 동서가 대학을 나왔고 더군다나 선생님이라는 사실이 무척 신경 쓰였었어. 어머님은 동서가 우리 집으로 시집오는 걸 엄청 좋아하고 기대하고 계셨지만, 내 마음은 바늘방석이었어. 그런데 생각했던 거와 달리, 교만하지 않고 내게 살갑게 대해주는 동서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 난 어머니 앞에 있으면 꼭 버러지가 되는 기분이었어. 바보 등신이 되는 기분, 동서는 잘 모를 거야."


형님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친정도 멀리 있어 기댈 사람도 없는데, 따로 살면서도 거의 매일 집에 오셔서 사람을 괴롭히니 정말 죽을 맛이었다는 형님! 하루는 '딩동'소리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고 했다. 초인종을 한참 눌러도 나오지 않자, 어머님이 그냥 가시더라고.  나는 형님이 느끼던 것과 똑같지는 않았겠지만, 어머니 앞에 서면 바보가 되고 등신이 되는 그 느낌을 점점 실감하게 되었다.


그냥 견뎠다. 우리 집의 구조가 그랬으니 누군가 한 사람은 그 역할을 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결혼 후 부부가 부모님과 따로 사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고, 대부분의 신혼부부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는데, 평생 자식만 바라보고 자식을 옆에 끼고 살고 싶어 하시던 어머님과,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묵시적인 주변의 분위기가 흐르던 시댁이었다. 나는 엄청나게 힘든데, 어떤 정해져 있는 프로그램 속에 그냥 거기에 끼여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분리불안장애! 그 말은 내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우리 어머님의 심리상태가 그랬을 거라는 걸 너무 늦게 알았다. 어머님을 모시고 살면서, 나를 힘들게 한 사건들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렵다. 왜냐하면 어머님의 일상이 그러셨으니까. 그중 나를 가장 괴롭힌 사건이 있었다.


"그렇게 안 봤는데, 정말 나쁜 사람이구먼? 아니, 전세로 살다가 결혼 6년 만에 새 아파트로 이사를 간다면서 같이 살던 시어머니를 버리고 가? 그렇게 사는 거 아녀. 배웠다는 사람이 어째 그려?"


어머님과 친하게 지내시는 동네 할머니의 그 말씀에 난 피가 거꾸로 솟는다는 게 뭔지 체험했다. '왜 그런 거짓말을 하시는 걸까? 이젠 나를 피를 말려 죽이려고 하시는구나!' 더군다나 그 동네 선생님이었던 나는 그 수치심에 치를 떨었다. 어머니께 그 거짓말에 대해 따졌지만,  별 반응이 없으셨다. 늘상 반복이 되던 괴롭힘, 그리고 아무 해명도 없이 웃으시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거는 어머니!  그런 반복이 나를 서서히 화병 환자로 만들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또 6년이 흘렀다. 혼자 살고 계시던 아버님까지 함께 모시기 위해 준비했던, 방 네 칸짜리 큰 아파트로 이사 가기 며칠 전에 큰딸이 엉엉 울며 내게 말했다.


"엄마.... (흑흑) 이사 갈 때 할머니 모시고 가면 안 돼? 같이 살게 해 줘..... 엄마... (흑흑)...."


오, 하느님!


난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았다. '매번 이사 갈 때마다 왜 이러시는 걸까?' 내 심장은 뻥 터져버릴 것 같았다. 어머님은 역시나 당신 거짓말에 아무런 해명이 없으셨다. 큰며느리는 모시지 않을 거고, 하나 남은 작은며느리가 당신을 평생 모셔줄 거라 믿으면서도 어머니는 뭐가 두려우셨던 걸까? 당신을 버리고 갈까 봐 무서우셨던 걸까? 엄마와 떨어지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아이처럼?


아버님을 위해 준비했던 이 집에, 아버님은 입주 4개월 전에 내 가슴에 깊은 슬픔을 남기시고 하늘나라로 떠나셨고, 어머님은 이 집에서 우리 가족과 함께 5년을 더 사셨다  그리고 평생 어머님을 모시고 살겠다는 내 약속은 지켜 내지 못했다. 학교를 떠날 정도로 내 몸과 마음은 와르르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다.


그 방송을 들으면서 분가할 당시의 어머님 고통이 가늠이 되어 마음이 몹시 아팠다. 특별한 인연으로 한 집에 함께 살면서 큰 고통과 아픔의 시간을 보냈지만, 분가 이후 온 마음으로 서로에게 정성을 들이며 서로를 깊이 사랑하는 고부가 되었음이 가슴 저리게 감사하다. 서로를 귀히 여기는 것만큼 아름다운 게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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