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님을 모시고 힘겹게 오랜 시간을 견뎠다. 그 17년 동안 어머님은 내 아픈 모습을 자주 보고 사셨다. 입원도 자주 했다. '어머니에게 난 어떤 존재였을까?' 당신을 평생 모셔주리라 믿었던 며느리, 당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주들을 셋이나 낳아 준 며느리! 나는 어머니께 늘 뭔가를 드리려고 애썼지만, 고맙다는 말은 거의 듣지 못하고 살았다. 가끔 만나는 큰며느리가 사준 물건 하나를, 두고두고 자랑하셨던 어머니를 보며 난 쓸쓸함과 서운함을 동시에 느꼈던 것 같다.
뭐랄까? 미리 다 짜여진 틀에 새사람이 들어간 느낌? 그 느낌이 종종 나를 힘들게 했다. 힘든 성격의 시어머님을 결혼 안 한 시동생에게 책임지라고 말했다던 우리 씩씩한 형님, 그리고 그 사실을 인정하고 새 며느리에게 온갖 기대를 했던 모든 시댁 식구들! 난 결혼 후 늘 어깨가 아팠다. 그 통증이 너무 심해서, 수업 후 쉬는 시간에 고사리 손의 학생들에게 어깨를 때려달라고 부탁한 적도 있었다.
어머님과 함께 살고 싶어 한 그 남자에게 난 바로 오케이를 했지만, 그 이후의 내 삶은 정말 지치고 또 지치는 연속의 나날이었다. 모두가 다 좋아 보였다. 어머님도, 내 남편도, 아주버님도, 형님도, 고모도, 내 아이들도, 그런데 오직 나 한 사람만이 힘겨워하고 있었다. 내가 평생 살아가야 할 길은 이미 정해져 있는 듯했고, 난 그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었다. 힘든 마음을 잠시 쉬고 싶어 형님께 구원 요청을 했지만, 돌아온 답은 "난 하루도 모실 수 없어. 어머님이 오시면 수영장도 못 가고, 뭐도 못하고, 뭐도 못하고..." 작은 불빛이 내게서 사라지고 있었다.
17년은 오롯이 그렇게 흘러갔고, 주변 사람들은 여전히 행복해 보였다. 병가를 자주 내고 몸 약한 교사라는 꼬리표가 달렸던 내게 '만성피로증후군'이라는 병명이 붙여졌고, 널브러진 내 몸뚱이는 1년이라는 휴식이 필요했다. 병 휴직을 끝내고 나는 학교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렇게 살다가는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 담당 의사 선생님의 권유로 시작된 어머님과의 분가로 어머님도 나도 아픔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면서 우리 두 사람은 스스로를 측은지심으로 바라보는 깊은 사이가 되었다.
퇴직 후 맞이한 첫 스승의 날, 제자들을 만나고 집에 돌아오니, 현관문 앞에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난 누가 다녀가셨는지 바로 알고, 시어머님께 전화를 드렸다.
"오늘이 스승의 날인데, 너 쓸쓸할 것 같아서 하나 샀다."
어머님 말씀에 울컥 목이 메고 말았다. 지금도 스승의 날이면 어머님의 꽃다발이 떠올라 하늘나라에 계신 어머님을 보며 감사한 미소를 짓곤 한다.
사진 : 네이버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