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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수아 Jan 13. 2024

비밀은 지켜주라고 있는 거야

유튜브에서 말기 암 환자가 된 유명 의사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그는 자부심을 가지고 암 환자 치료에 전념한 대학교수였는데, 살다 보니 자기가 말기 암 환자가 된 것이다. 그 영상에서는 본인의 암 판정 당시의 마음과 치료 과정, 완치된 이후의 새로운 삶에 대해 담담히 말을 이어갔는데, 영상이 끝난 후 내가 매우 감동했던 한 부분이 있었다.


그는 자기가 갑자기 이 세상을 떠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컴퓨터의 비밀 파일을 모두 삭제했다고 했다. 거기에는 자기에게만 털어놓았던 환자들의 비밀스러운 내용이 담겨있었고, 그건 철저히 숨겨주어야 한다는 책임감에 그 일부터 했던 것이다. 참으로 의사다운 의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또한 남들의 비밀을 여러 개 알고 있다. 입이 무거워 보이는지,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이야기를 내 앞에서, 한숨을 쉬며, 때로는 눈물을 흘리며 했던 그 이야기들을 나는 누구에게도 전하지 않았다. 그건 그 사람과의 무언의 약속이기 때문이고, 꼭 지켜야 할 나와의 약속이기도 했다.


​오래전 모임에서 험담을 잘하는 한 사람이 있었다. 우리 모두 아는 사람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그 모습에,  듣고 있던 나머지 사람들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런 일이 반복이 되자 사람들이 거리감을 두게 되었고, 그 사람 앞에서는 말조심을 하게 되더니, 끝내 그 사람은 모임에서 사라져 버렸다.


고민하고 또 고민을 하다, 누구 한 사람에게라도 털어놓고 싶은 그 마음을 이해한다면, 함부로 입을 놀릴 수 없으리라. 어쩌면 그 사람의 삶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일, 어쩌면 용서가 안 되는 누군가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가슴에서 피가 흐르는 듯한 그런 말을 어찌 장난스레 여기저기 떠벌릴 수가 있겠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처럼 그럴 것이고, 사람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없는 극소수의 사람만이 어리석은 행동을 할 거라 여겨진다.


가끔 티브이에서 돌려보기로 드라마를 볼 때가 있다. 단막극의 제목이 특이해서 끌렸고, 주인공이 내가 좋아하는 왕빛나 배우라서 시작 버튼을 눌렀다. '불행을 사는 여자' 왜 제목을 그렇게 단 건지 궁금했다. 난 브랜드 네이밍 일을 하는 사람이라 늘 이름에 관심이 많으니까.


​왕빛나는 누가 보더라도 착한 사람이다. 누군가 어려움에 빠지면 몸이 먼저 움직이고, 그 사람의 아픈 마음을 정성껏 들어주며 위로해 준다. 극을 함께 끌고 나가는 후배는 내세울 것이 없는 알바 여대생이었다. 가난에 찌들었고, 삶에 찌든 가여운 청춘이었다. 그 후배에게 왕빛나의 존재는 구세주였다. 모든 걸 다 이해하고 최선을 다해 도와주려는 사람! 그래서 후배는 그나마 살아갈 힘을 얻었다. 그런 후배가 십수 년이 지난 어느 날 언니에게 이런 말을 한다.


"난 불행한 여자였고, 언니는 불행을 사는 여자였지."


그 후배를 가장 힘나게 해 준 존재도 왕빛나였지만, 그녀를 가장 비참하게 만든 사람도 왕빛나였다. 그녀의 속을 다 알고 있던 왕빛나는, 대학 동아리 모임에서 그녀가 밖으로 나가자, 그녀의 참혹한 가정환경에 대해 술술 말을 하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가장 착한 얼굴로. 두 사람은 글을 쓰는 작가가 되었고, 주변 지인들도 그런 관계로 이어져있는데, 후배의 남편이 직장 내에서 불륜을 저질렀고, 부부 싸움 끝에 왕빛나 집에 들어와 함께 살게 되었다. 그녀들의 선배가 왕빛나에게 물었다. 후배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 같다고, 세상에 비밀이 어디 있냐고 하니, 왕빛나는 이렇게 말한다.


"맞아. 다 알게 될 일인데 뭐. 세상에 비밀이 어디 있어?"


​그러고는 늘 그랬듯이 술술 그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푼다. 주변 모든 문인들이 다 알기를 바라면서. 마침내  후배는 첫 소설의 출판기념회를 연다. 작품 제목은 '불행을 사는 여자'였다.


드라마나 소설이나 영화는 현실보다는 극단적인 스토리로 보는 이를 자극하지만, 사실 픽션과 비슷한 게 현실인 경우가 많다. 왕빛나처럼은 아니어도, 주변에 알릴 만한 어떤 이야기를 알게 되었을 때 왕빛나 같은 마음으로 슬며시 흘리며 쾌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실제로 있는 것이다.


비밀은 지키라고 있는 건데, 그리고 그 비밀은 어차피 다 알게 될 일이 아닌데 말이다. 난 굳이 비밀을 지켜달라고 말하지 않더라도, 그 사람에게 큰 흠으로 남을 것 같다는 판단이 서면 그 아픈 사연을 지켜주고 산다. 그건 배려가 아니라, 우리가 상대방을 지켜주어야 할 기본적 행위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비밀을 지켜줄 수 있는 인연이, 그래도 한둘은 있어야 세상 살아갈 힘이 나지 않을까.


사진 : 네이버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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