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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수아 Jan 14. 2024

맷집

이 글은 2016년, 어머님이 살아계실 때에 쓴 글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여인


감기몸살이 심해 병원에 다녀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니 현관문 앞에 시어머님이 서 계셨다. 분가 이후에 늘 전화 없이 오시는 어머님, 이럴 때가 제일 속상하다. 어머님이 담그신 두 가지김치와 "비타 500' 맛과 비슷한 비타진, 이 세 개가 제법 무거웠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의 짐은 늘 그렇게 무거웠었다.


입맛이 없어 점심을 제대로 먹지 못해 병원에서 나오며 바로 사가지고 온 '항아리 보쌈'이라도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따뜻한 보쌈을 드신 어머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가시려고 일어서는 어머님께 털모자 두 개를 가방에 넣어드리고, 노란빛이 도는 스카프를 목에 둘러드렸다. 색이 곱다고 좋아하시는 어머님을 배웅하고 집으로 들어왔다. 마음이 훈훈한 게 감기가 빨리 나을 것만 같았다.


시어머님을 만난 지 26년이 넘었다  집안 정리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도, 설거지가 산처럼 쌓여있어도, 분가 이후 갑자기 오시는 어머님이 하나도 불편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결혼하는 날, 미용실에 가기 전에 아버지께 큰절을 올렸다. 어느 선생님께서 내게 일러주셨기 때문이다. 절을 하고 일어서기도 전에 나는 왈칵 눈물을 쏟았고, 아버지도 눈물을 흘리셨다. 그러고는 내 손을 잡으시며 '온실 속 화초처럼 키워서 밖으로 내보내기가 겁이 난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나는 온통 긍정 마인드로 꽉 차 있던 사람이라 아무 두려움이 없었고, 결혼생활도 활짝 웃으며 살 줄만 알았다.


내가 살면서 만나보지 못했던 유형의 어르신을 모시고 살면서 나는 '혹시 꿈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종종 했다. 강한 부정성이 몸에 배어계신 어머님과의 하루하루는 마치 얼음 위를 걷듯이 조마조마했다. 갑자기 어떤 폭탄이 터질지 모를 불안감이 집안에 흐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어머님은 당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가끔 내게 들려주셨다. 돈 10원 벌어온 적 없는 장애인 남편과 꼬물꼬물 삼 남매를 벌어 먹이는 게 너무 힘들어 물가에 한참을 서 계셨다는 말씀, 아무리 가난해도 정성껏 키웠더니 이웃 사람들이 귀티가 나는 아이들이라고 칭찬해 주어 기분이 좋았다는 말씀, 당신 소망은 큰아들, 작은 아들네 식구들이랑 3층 집에 모여사는 거라는 말씀 등등. 한 번도 모시지 않았고, 절대 합가 할 생각이 없는 우리 형님의 강한 의지에 어머니의 3층 집 소망은, 내가 결혼하기 전에 이미 포기된 상태였다.


왜 그리 힘든 시집살이를 견디고 살았냐는 질문을 가끔 받을 때가 있다. 그래서이다. 어머님의 한 많은 일생에 무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마음에 맷집까지 강했다면 내가  건강히 잘 버텼을지도 모르겠으나, 아버지 말씀대로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나는 그 부정적 기운에 몸과 마음이 서서히 사그라들고 말았다.


나는 아직도 맷집이 세지 못하다. 스물네 살 교대를 졸업한 후에 첫 발령을 받은 학교의 교장선생님께서는 교사들을 매우 존중해 주시는 분이셨다. 나이 어린 교사들에게도 항상 깍듯하게 존댓말을 사용하셨다. 그렇게 존중받으며 시작한 교사 생활은, 교사란 '역사적 사명'을 실천하는 역할이라는 다짐을 하게 만들었고, 속은 어떨지 모르지만 공손한 학부형들의 태도에 나는 어느새 존중받는 게 익숙한 사람이 되었다. 존중받았던 딸로 자라, 존중받는 교사가 된 나였기에, 며느리에게 함부로 대하는 것이 익숙하셨던 어머님이 더 힘들었을 것이다.


​또한, 그런 내가 사업자 등록증을 가지고 브랜드 네이밍 일을 하면서는 교사로 살 때 경험하지 못했던 상황을 가끔 만나기도 한다.  아직도 나는 맷집이 강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세상에는 좋은 사람들이 훨씬 많기 때문에 기분 좋게, 보람을 느끼며 일할 때가 많다. '맷집'이라는 글감으로 글을 쓰려는데, 가장 먼저 떠오른 분이 나의 시어머님이셨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어머님은 두려움 없이 부딪히고 싸우셨다. 그래서 당신도 모르게 많은 가시가 자연스레 어머님께 달라붙었던 것 같다.


어머님의 도전 정신은 여든이 넘어도 끄떡없으셨다. 주소 하나만 있으면 부산이건, 서울이건 발품 팔아 찾아가는 분이셨다. 중요한 일이 있으면, 전화 통화가 안 되어도 무작정 출발을 하시던 분이셨다. 가끔 허탕을 치고 돌아오시면 내가 다 속상했지만, 어머님은 전혀 개의치 않으셨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부딪혀보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내가 조금씩이라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모두 나의 시어머님 덕분이다. 어머니를 떠올리면 용기가 불끈 생긴다. 당신의 인격까지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려 사시다 떠나신 우리 어머니는 한 마디로 '인간승리'셨다. 정말 멋진 분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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