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채수아 Jan 25. 2024

긴 하루

그날은 시어머님이 대학병원 이비인후과에 가시는 날이었다. 혼자서도 잘 다니시는 분이지만, 걱정이 되어 남편과 나는 일찍 대학병원으로 출발했다. 며칠 전의 진료에 두 딸이 동행을 했었는데, 이비인후과 의사가 아주 불친절했노라고 했기에 더 마음이 쓰인 것이다.


어머님께서 이비인후과에 가게 된 계기는 전화를 받으실 때마다 윙윙 소리에 잘 들리지 않는다고 하셔서 전화기를 새로 놓아드렸는데, 할머니 집에서 자고 온 큰 딸이 아무래도 전화기가 문제가 아니라 할머니 귀가 문제인 것 같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한쪽 귀는 잘 들리고 다른 귀는 잘 들리지 않는 것 같다고.


의사는 역시 불친절했다. 어느 귀가 아프신 거냐고 묻는 말에 어머님은 그것도 모르느냐고 의사에게 핀잔을 주셨다. 아마도 며칠 동안 귀가 불편하고 통증이 있던 것에 화풀이를 하시는 것 같았다. 의사는 오늘이 진료 일이 아닌데도, 우리 어머니 때문에 출근을 했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두 사람 사이의 묘한 신경전이 느껴졌다. 나도 거기에 합세해서 귀에 통증이 있을 것을 예상해서 약을 처방해 주어야 했는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내 목소리에는 절제된 원망이 묻어 있었을 것이다. 의사는 내게 물었다. 관계가 어떻게 되느냐고.  그 목소리에도 절제된 화가 묻어 있었다. 나는 둘째 며느리라고 대답을 하면서 솔솔 피어오르려는 화를 잠재우고 있었다. 의사는 말했다. 이 상황에서는 약이 별 효과가 없어서 그렇게 한  것이라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30분이 지나가고 있었다. 같은 동작으로 계속 딱딱한 귀지를 파내는 동작이 꽤 안쓰럽게 느껴졌다. 간간이 약한 한숨 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나는 나의 행동에 급반성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너무 힘드시겠어요. 요 아래 커피전문점이 있던데, 커피 한 잔 사 올까요?"


내 질문에 의사는 괜찮다고 말을 했는데, 그 말소리는 평온하고 친절했다. 그러면서 우리 부부에게 힘드시면 밖에서 쉬고 계시라는 말도 덧붙였다.  우리는 진료실 밖으로 나왔다. 바로 커피 전문점으로 내려가 몇 가지의 차 세트가 들어있는 선물상자를 하나 사서 진료실로 들어갔다.


진료실 안으로 들어가니  귀지를 파내는 작업은 계속 진행이 되고 있었다. 총 한 시간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중간중간 통증이 있는지를 묻는 의사와 괜찮다고 대답하는 어머니 사이는 어느새 꽤 친밀해져 있었다.


의사는 청각 검사와 CT 촬영 날짜를 간호사와 잡으라고 하면서 다음번에는 그 대학병원 이비인후과에서 가장 실력이 뛰어난 교수님께 진료를 받게 해 주겠다고 말했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나오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나는 수납을 하고 남편은 어머니 카드로 연말정산 자료를 뽑으러 간 사이, 우리 어머니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커피 전문점에서 파는 커피 두 잔을 사가지고 오셨다. 감동이었다.


어머님과 함께 순댓국을 먹고 집에 모셔다 드렸다.  급하게 퍼주시는 된장 네 통을 받아서 돌아오는 길에, 형님에게 두 통을 건네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두둥실이었다. 참 긴 하루였다. 이렇게 어머님 살아계실 때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




사진 : 네이버 이미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