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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수아 Jan 26. 2024

밤나무 선생님

아버지 정년퇴임식 때 아버지의 첫 제자였던 시인 최세균 목사님께서 작은 시집을 만들어 참석하신 분들께 한 권씩 드렸습니다.


이 사진은 <시와 사랑>1994년 9월 호의 표지 사진입니다.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시는 그리운 나의 아버지.....


 

밤나무 선생님


                                    최세균


나는 그분을

밤나무 선생님이라 부르겠다


밤나무 꽃만큼 진한 향기가 없다면

35년 전 밤나무 교실에서

우리가 맡았던 선생님 냄새는

밤꽃 향기 그것이었다


밤나무 잎만큼 푸른 그늘이 없다면

그때 우리가 보았던 선생님 그림자는

밤나무 그늘 그것이었다

그래서 그분은 밤나무 선생님이다


그분이 정년퇴임을 하여 학교를 떠나도

그분은 여전히 밤나무 선생님이다


밤가시처럼 뜨거운 회초리가 없었다면

알밤처럼 잘 여문 제자들이 있었을까?


금년에도 밤나무 동산에 가을이 오면

나는 보겠네 그 사랑의 침묵을


모든 것을 쏟아 놓고 서 있는 거목의

그 주름을 보겠네


​♡


35년 전이다. 채용석 선생님이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에 부임해 오신 것이. 나는 6학년이었고 선생님은 우리 반을 맡으셨다. 나는 생각지도 않은 반장을 맡았고 선생님은 나를 극진히 아끼셨다. 그 선생님 때문에 나는 가장 배고프고 힘들었던 유년기를 너무나 행복하게 보냈다.


선생님은 너무나 강직하시고 청렴결백하셨을 뿐 아니라 제자들에 대한 집념이 무서우리만큼 강하셨다. 훌륭한 제자를 만드는 것은 선생님의 사명이셨다. 공부를 게을리하거나 옳지 않은 행동을 하면 가차 없이 종아리를 치셨다. 아마 선생님한테 종아리를 맞지 않은 아이는 없었을 것이다. 밤가시처럼 무서운 회초리였다. 그러나 그 가시로 밤송이는 밤톨을 키우고 알밤을 쏟아놓듯이 선생님은 일꾼들을 사회로 쏟아 놓으셨다.


좋은 추억거리가 되려고 했는지는 몰라도, 우리는 거의 반년 이상을 밤나무 밑에서 공부를 했다. 고삼저수지 마무리 공사에 학교가 물에 잠겼기 때문이다. 푸른 밤나무에 걸려있는 칠판을 붙들고 우리로 하여금 잠시도 한눈팔 수 없도록 치열하게 공부를 가르치신 선생님에게서 나는 밤나무의 품을 보았다. 밤나무는 그늘이 참 넓었다. 밤꽃의 향기는 만만한 것 같으면서도 독한 데가 있었다. 그 독한 것 같은 향기를 벌들이 모아 꿀을 만들고 그 꿀은 몸에 좋은 약이 되었다. 선생님에게서 나는 향기가, 그런 것이었다.


선생님을 만난 사람은 모두 훌륭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 선생님이 오늘 정년퇴임을 하신다. 후회 없이 강단을 지켜오신 이 시대의 흔치 않은 스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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