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위복(2017.2.21 일기)

by 채수아

어머님 컨디션이 예전과 다르시다. 늘 불안 불안했는데, 모습에서 약간의 힘이 느껴지고 계신다. 형님네서 삼시 세끼 잘 드시고, 꼼꼼한 아주버님께서 약을 잘 챙겨주시고, 어머님 증세에 대해 계속 체크하고 계시는 수고로움과 함께 주말이면 어머님 댁에서 우리 가족과 함께 즐거운 시간(삼 남매가 주는 기쁨이 가장 크다)을 보내고 계시는 어머님은, 우리 모두의 정성 덕분인지 감사한 마음이 들고 보람도 있었다. 그런데 다시 떠오르는 생각은 어머님이 새로 복용하고 계신 '빈혈약' 덕분인 것 같다.


지난주에 어머님의 속옷을 처음 빨았다. 깔끔하신 어머님이 절대 허락 안 하시던 일이었지만, 어머님이 밖에서 심하게 넘어지셔서 얼굴과 엄지손가락을 몇 바늘 꿰매신 이후, 어머님도 그 부분을 포기하셨는지 내가 빨겠다고 조르자 그냥 내버려 두셨다. 실밥 푸실 때까지만이라도 하겠다는 내 말이 먹힌 것이다. 속옷을 이틀 연속 빨면서 내가 느낀 것은, 어머님께 빈혈이 있으실 거라는 확신이었다. 순간 어머님이 길에서 쓰러지신 것도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신 게 아니라, 핑 정신을 잃으셨다고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나는 남편에게 이 사실을 전했고, 남편은 아주버님께 카톡으로 알리면서, 며칠 후에 얼굴 실밥 제거하러 가시는 날에 빈혈검사를 같이 하시라고 덧붙였다.


서로 따로 모시고 있는 상황이고 아주버님이 총책임을 맡은 입장이라 서로 의견을 교환하면서 어머님을 위한 방법을 찾고 있지만, 그게 가끔은 망설여질 때가 있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어머님이 우리 부부를 더 가깝게 생각하시는지, 아주버님께 말씀 안 하셨던 걸 주말에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일이 종종 있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에 대해 말씀을 드리면, 나중에 아주버님은 어머님께 왜 자기에게 미리 말씀하지 않으셨냐는 식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거의 대부분은 아주버님 질문에 어머님이 답하는 식으로 증세 체크가 되고, 몇 가지 부분에서 우리가 알게 된 사실을 말씀드리는 것인데, 그 부분에서 묘한 기운이 감지되곤 했다.


이번 속옷 사건도 아주버님은 매우 불편하게 받아들이셨다. 형님이 매번 속옷을 빨려고 청했지만 어머님이 완강히 거절하시며 심하게 화를 내셔서 빨아드리지 못한 것이니 절대 오해 없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또 한 가지는, 드시고 계신 차가버섯이 검은 가루이니 분비물이 갈색일 것이고, 그건 빈혈과 상관이 없을 거라고, 핏방울은 이틀에 한 번 정도 살짝 비치는 정도라고 하셨다. 여자인 내가 경험상 보기에 그건 차가버섯 100% 분비물은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어머님이 이동 시에는 늘 커다란 약상자가 따라온다. 그 직사각형 통 안에는 드시는 약이 잘 정돈되어 있고, 우리 부부는 식전 약 식후 약을 잘 챙겨드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약 드시는 시간표가 다시 만들어져 그 안에 있었다. 빈혈약이 들어가고 혈압약이 빠져있었다. 그리고 빈혈약을 새로 처방받은 게 아니고, 의사 선생님께서 몇 달 전에 이미 처방받은 빈혈약을 드시라고 했단다. 많은 약의 빈혈약이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아주버님이 남편에게 보내신 카톡에는 어머님 빈혈 수치가 8이고, 7로 떨어지면 수혈을 받게 될 거라고 적혀 있었다. 자주 기운 없어하시고 가끔 휑 돈다는 말씀을 말기 암 환자가 겪는 고통인 줄만 알았는데, 세상에나... 미리 주신 빈혈약을 왜 꼼꼼한 아주버님은 방치하고 계셨을까? 그게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다. 빈혈과 더 가까운 여자인, 형님이 약을 챙기셨으면 바로 드시게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시 들기는 했다. 교회 활동으로 하루의 많은 시간을 보내시던 형님이 여전히 바쁘게 활동하시는가 보다. 큰며느리가 늘 바쁘다는 말씀을 자주 하시며, 밥 챙겨주고 나가고, 밥 차리러 들어와 주방에서 동동거리는 모습에 좀 미안해하시는 것 같았다. 형님은 식사 당번이고, 퇴직하신 아주버님이 나머지 모든 것을 챙기고 계신다. 어머님을 모신 적이 없고 17년 힘겹게 어머님을 모시고 살던 내게 늘 미안해하시고 고마워하신 아주버님은 늘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고 사시는 분 같았다. "이 사람은 세상에서 동서에게 가장 잘하는 사람이야"라고 형님은 몇 번이나 내게 말했었다. 내 남편도 누님도 느끼지 못했던 걸 나는 충분히 느끼고 살았다.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외국에서 식사 거르지 말고 힘내라고 말씀하셨던 분이다. 내게는 아버지 같고 오라버니 같은 그런 존재였다.


어찌 되었든 결론은 버킹검! ㅎㅎ 빈혈약을 며칠 드셨다는 어머님은 건강하셨을 때의 기운이 몸 전체에 흐르셨다. 작아진 몸이시긴 하지만 더 잘 웃으시고 발걸음에 힘이 생기신 느낌이다. 어머님 말기 암 선고 후 많은 공부를 하고 있다. 어머님의 삶을 되돌아보며 죽음을 선택하지 않으시고 홀로 가족을 책임지고 사셨던 한 여인의 위대함에 자주 눈물이 핑 돈다. 그리고 사랑받고 있다는 그 느낌이 환자에게는 최고의 약이라는 것도 순간순간 알아간다. 사람이 약이고, 사람이 존재 이유고, 사람이 희망이라는 그 사실이 가슴 아프게 뼛속으로 스미고 있는 요즘이다.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14화분리불안장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