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동안의 분가(2017.3.7 일기)

by 채수아

(이 글을 쓰려니 가슴이 몹시 저린다)


내게는 시누님이 한 분 계신다. 아주버님과 우리 남편 사이의 딸 하나, 어머님의 가장 아픈 손가락!


결혼을 해서 우리 부부와 시어머님은 방 두 칸짜리 작은 전셋집에서 살았지만, 아주버님은 30평짜리 브랜드 아파트에 살고 계셨다. 결혼 전 시댁 식구들께 처음 인사를 드리러 갈 때, 남편은 본인이 사는 집이 아닌 형님 네로 나를 데리고 갔다. 아무래도 근사한 집에서 밥을 먹이고 싶어 하신 어머님 뜻이었으리라. 형님네는 신혼집을 시어머님 청약을 이용해 작은 아파트에서 깔끔하게 시작했고. 이어서 집을 넓혀 가신 거였다.


남편의 누님 네는 결혼 전에도 몇 번 간 적이 있었다. 음식 솜씨가 뛰어났던 시누님은 내게 늘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 주었고, 매우 친절하게 대해 주셨다. 내가 첫아이를 임신했을 때 그 집에 가면, 13평 작은 아파트의 안방에 이불을 깔아주고 쉬라고 하시며 문을 닫고 나가셨다. 음식이 다 차려지면 나를 부르고 많이 먹으라고 몇 번이나 말씀하셨던 분! 난 너무나 오래된 그 추억을 생각하면 가슴이 따스해진다. 지금도 총각김치를 보면 입덧하는 나를 위해 자주 담가오셨던 시누님의 그 김치가 떠오른다.


형님(지금부터 시누님을 형님이라 칭할게요)은 20여 년 전 이혼을 하셨다. 가족과 의논도 없이 갑자기 선포하셔서 온 가족을 놀래켰다. 남편 복 없다고 평생을 한탄하시던 어머님께 딸의 이혼은 큰 충격이었다. 어머님은 상처가 큰 딸을 바라보는 게 고통스러우셨던지 그 이후 더 사납게 형님을 대하셨고 두 사람의 골은 점점 깊어갔다. 나는 어머님을 모시고 살면서 힘든 이야기를 동서 형님보다 시누님께 더 많이 털어놓았었는데, 말하다 보면 내가 오히려 시누님의 하소연을 들어주는 시간이 길어졌다.


충청도 친정에 딸을 남겨두고 두 아들만 데리고 수원에 정착한 어머님, 어머님이 시골에 내려오실 때마다 '오늘은 나를 데려가려나?' 기대했다 깨지고를 반복하며 엄마를 미워했던 딸! 초등학교 6학년이 되어서야 수원으로 올라왔지만, 생계를 책임진 바쁜 엄마 대신 살림을 맡아하던 어린 시절의 아픔... 형님은 엄마에 대한 상처가 꽤 깊었다.


결혼 6년이 지난 후, 시어머님이 나를 괴롭히는 수위는 점점 높아지고 있었고 나는 이러다가 정신 병동에 입원하게 되지 않을까, 무서운 생각이 들 정도로 정신이 피폐해지고 있었다. 형수가 모시지 않으면 어머니를 혼자 따로 살게 할 수 없다는 남편의 고집, 죽어도 어머니를 모시지 못하겠다는 동서 형님, 그때 나의 구세주가 되어주신 분은 아주버님이셨다.


"제수씨, 정말 미안합니다 내가 우리 어머니 성격을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내 아내는 어머니 못 모셔요. 어머니 '어'자만 나와도 학을 띠는 사람입니다 제가 깊이 생각해 보고 방법을 찾아볼게요."


아주버님이 찾아낸 방법은 이혼한 여동생이 생계를 위해 식당을 차리려고 계획을 세우고 있고, 그때 한참 손이 가는 두 아이를 돌봐달라고 어머니께 도움을 청하고 있으니 어머님과 동생 식구들을 함께 살도록 하는 거였다. 형님은 안양에 분식집을 바로 냈고, 아주버님이 마련해 주신 새 거처에서 네 사람이 함께 살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이 상황에 놀라기도 했고, 결혼 이후 오로지 우리 가족만 사는 '평화로움'에 나는 격한 감사를 느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켠에 어머님에 대한 죄스러움이 있었다. 그래서 난 내 통장을 털어 500만 원이 든 어머님 통장을 만들어 드렸다. 뭔가를 드리고 싶어 한 내 최선의 선물이었다. 어머님은 그 집에서 한 2년 정도를 사셨지만, 매일 우리 집으로 출근을 하셨고, 난 오시는 어머님을 반갑게 맞으며 잘해 드리며 살았다. 어머님은 같이 사는 딸과 너무 자주 싸우니 힘들다고 하셨고, 형님은 엄마의 잔소리에 짜증이 올라와 미치겠다고, 엄마랑 어떻게 6년 넘게 살았냐고 하소연을 하기도 했다.


둘째 아이 육아휴직이 끝나고, 학교로 복귀할 때가 다가왔다. 난 옆에 사는 아들 친구 엄마에게 내 아이들을 이미 부탁해 놓은 상태였다. 휴직 기간 동안 매우 친하게 지내던 동생이었다. 그 동생도 그렇게 하겠다고, 용돈이나 두둑이 달라고 농담까지 하며 웃었다. 그때 즈음 시어머님이 집에 오셔서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에미야, 내 새끼를 어떻게 남에게 맡기니? 내가 훈이 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딱 2년만 키울 테니까 인구 엄마에게 맡기지 마라.'


가슴이 심하게 뛰었다. 그렇게 나를 함부로 대하고 괴롭히던 분이 그나마 떨어져 살면서 조금 변하셔서 감사했는데...


"어머니, 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제가 생각해 보고 말씀드릴게요."


난 그 의논을 남편과 한 게 아니라 동서 형님과 했다


"동서, 안 돼. 절대 안 돼. 지금 그나마 관계가 좋아지고 있는데.... 들어오시면 어머니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실 거야."


그다음 날 난 어머님께 전화를 드렸다.


"어머니, 그냥 어머니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그리고 그 이후 어머님과 함께 거의 10년 가까이를 더 살았다. 내 몸이 망가질 때까지 말이다. 어머님이 가장 행복하게 사실 수 있는 공간에 오고 싶어 하시는걸, 난 차마 막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진 : 네이버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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