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을 하러 동네 학교 운동장에 나갔더니, 약속이라도 한 듯 할머님들이 한 분도 나오지 않으셨다. 혼자 한 바퀴를 돌고 나서, 아파트 단지를 돌려고 다시 학교를 나왔다. 학교 운동장은 땅의 쿠션이 좋다는 장점이 있고, 아파트 단지를 도는 건 나무 향이 있어서 좋다. 한 5분 정도 걷다 보니 배롱나무가 예쁜 곳이 있어 사진을 찍으러 계단 몇 개를 내려갔다. 한 할머님이 앉아서 고추를 다듬고 계셨다. 난 방해를 하지 않으려고 살금살금 걸어 다니며,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참 부지런도 허시네. 우리 며느리는 지금 자고 있는데..."
난 할머니 곁으로 가서 말했다.
"어머니, 저도 그랬어요. 일요일에 늘 늦잠을 잤었는데, 나이가 좀 드니 일찍 일어나게 되네요."
할머니는 내가 반가운지 이런저런 말씀을 이어가셨다. 나는 아예 할머니 옆에 철퍼덕 앉아서 할머니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큰며느리가 참 착하다는 얘기, 작은며느리는 직장에 다닌다는 얘기, 사 남매에 손주가 아홉인데 큰며느리가 넷을 낳았다는 얘기, 큰며느리가 셋째를 유산시키려고 할 때 생명을 그리하면 안 된다고 뜯어말리셨는데, 나중에 넷째까지 낳더라는 얘기, 형제가 없는 둘째 아들의 외동딸이 외로움이 많아 그 전화를 받고 자주 올라온다는 얘기... 할머니의 이야기는 줄줄이 사탕처럼 이어졌다. 시집와서 17년 동안 시부모님과 함께 삼 형제 가족이 모두 모여 살았는데, 그래도 참 재미나게 살았다고도 하시고, 바가지에 밥과 반찬을 모두 넣어 비빔밥을 만들어 며느리 셋이서 먹곤 했는데, 당신은 비빔밥을 좋아하던 사람이 아니라 그게 싫었지만, 나중에는 좋아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해 주셨다 살아오면서 남 퍼주는 게 제일 재미있었다는 말씀에 나는 손뼉을 치며 까르르 웃었다.
"맞아요, 어머니! 재미있잖아요. 결혼해서 시어머님이 제게 그러셨어요. 태어나서 너처럼 남 주는 거 좋아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요. 이웃집만 주는 게 아니라 두 형님네를 잘 챙기니까, 싫어하지는 않으시더라고요."
이제는 할머니 목소리가 슬슬 높아지셨다.
"나도 그런 소리 들었제. 남 주는 게 그렇게 좋으냐고, 댁 같은 사람 처음 봤다고. 근디 남 주기 싫어하는 사람은 썩어서 버리면 버렸지, 증말 밤 한 톨 안 줍니다."
자식 복에, 며느리 복에, 손주 복까지, 당신은 정말 살아온 게 너무나 감사하다고 하시면서, 어느 좋은 날에 스르르 눈을 감고 저세상에 가는 게 소원이라는 할머니 말씀에 숙연해지기도 했다. 가족이 다 나가면 혼자 점심 먹는 게 제일 고역이라고, 밥맛이 너무 없다고 하시는 할머니 말씀에, 다음에 맛있는 점심을 사드리겠다고 하니 손사래를 치시며 웃으시는 할머니, 참 잘 살아오신 이쁜 할머니!
사람! 난 사람이 좋다. 특히 사람다운 사람을 보면, 향기 좋은 나무숲을 걸어 나온 것처럼 맑게 힐링이 되곤 한다. 감사한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