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닮아서 약지 못하고 어수룩한 딸이 좀 답답했을 수도 있었을 거다. 그렇게 자란 아이가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니 엄마가 신기한 듯 내게 물었다.
"학생들이 그렇게 이쁘니? 자식도 안 낳아본 애가 애들을 어쩜 그렇게 이뻐하니?"
화성 송산 아이들이 수원에 사는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오는 걸 보고 하신 말씀이셨다. 동네 선생님이셨던 아버지의 제자들이 우리 집에 수시로 놀러 오던 걸 평생 보신 엄마는, 남편을 국화빵처럼 닮은 큰딸이 신기했을 것이다. 책을 끼고 사는 것까지 국화빵이었으니까.
교장 선생님 딸에, 남들이 부러워하는 초등교사라는 직업임에도 남자 하나 보고 하는 결혼, 시어머님을 모시고 살아야 하는 가난한 시집살이에도,우리 부모님은 선뜻 '어머님 잘 모시고 살라고, 고생 많이 하신 분이신데 그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그렇게 나와 부모님은 '사람의 도리'에 맞는다는 판단을 했고, 그 선택은 오래오래 나를 고통스럽게 했다. 그래서 저는 가끔 부모님을 원망하기도 했다. 왜 나를 이런 바보멍청이로 키우셨을까, 왜 약지 못한 바보로 키우셨을까, 그랬다.
내가 가장 많이 닮은 분, 제가 가장 존경했던 아버지가 하늘 먼 곳으로 떠나신 지 10여 년이 지났다. 장애인으로 쓸쓸한 삶을 살다가신 시아버님, 마음의 고통이 사람을 얼마나 절망하게 만드는지 뼈아프게 가르쳐주셨던 시어머님, 또한 그 고통이 사랑으로 승화되는 기적을 체험하게 하신 시어머님은 6년 전에 내 곁을 떠나셨다. 진한 사랑으로 내 가슴에 살아계신 세 분이 하늘에서 나를 위해 기도하고 계신다는 걸 난 자주 느낀다.
바보멍청이로 살면서 많은 인연을 만났다. 가족으로, 친척으로, 친구로, 일로, 사제지간의 인연으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나는 내 방식으로 사랑했고, 줄 수 있는 걸 아낌없이 주면서 그걸 행복이라 생각했다. '배신'이라는 두 글자가 생각나는 몇 사람으로 인해 심한 가슴앓이를 하기도 했으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잠시 길을 잃기도 했지만, 회오리가 지나가도 내 곁에는 여전히 순백의 사랑으로 나를 지켜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 같이 울어주는 사람들, 내 기쁜 소식에 뛸 듯이 기뻐하는 사람들!
내게 없는 것 하나가 '질투'다. 질투는 인간의 본능이라서 사촌이 땅을 사면 당연히 배가 아픈 거라는 말도 있다. 왜 내 안에 '질투'라는 마음 주머니가 없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나를 보고 부럽다는 친구가 있었다. 질투가 심한 자기는 그것 때문에 때때로 삶이 너무 힘들다고 했다. 누가 돈을 많이 벌었다면 좋고, 자식이 잘되었다고 하면 좋고, 부부금슬이 좋다고 하면 좋고, 아는 문인이 책이 많이 팔렸다고 하면 좋고, 누가 좋은 집으로 이사했다고 하면 좋고. 남편과 별거 중이던 지인이 다시 합쳐 잘 산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좋고, 그냥 좋았다. 모두 잘되고,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되도록 울지 않고 되도록 많이 웃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