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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지영 Oct 01. 2020

깊은 잠을 잘 거예요!

오늘 밤만큼은 정말로,

 밤 열두 시가 가까워지면 간혹 아랫집 물 내려가는 소리, 정체불명의 구급차 소리가 들린다. 자명종 소리가 점점 더 커진다. 깊은 밤, 혼자 글을 쓰고 있으면 키보드 자판 두들기는 소리로 채워진다. 소리가 전부다. 그때만큼은 나 혼자만의 세상이다. 찬물을 끼얹은 듯 차갑고, 적막한 고요로 쓸쓸한 밤이다. 그 세상에서 나를 지키는 건 오롯이 나 자신일 뿐이다.

  자그마치 14일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쉽게 잠든 적이 없다. 자정을 넘기고도 꼬박 한두 시간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어제는 무릎이 아팠고, 그제는 복통이 있었다. 또 그리고 엊그제는 생각 때문이었다. 생각하면 또 다른 생각이 났다. 그 생각은 잠이 들어서도 계속됐다. 꿈에서조차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생각하는 조각상 정도는 남겨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로댕 말고, 한 차원 높은 것으로. 적어도 나는 아류가 되고 싶진 않으니까. 그러다 갖은 생각으로 잠을 설친 무거운 아침엔 벼랑 끝에 서 있는 내 얼굴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무릎의 기원


 모든 일엔 원인이 있고, 그에 따른 결과가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이건 어쩌다가 일어난 일인 걸까? 내 다리를 칭칭 감고 있는 붕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평생에 깁스란 건 해본 적이 없어서 더더욱 내 몸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걸을 때마다 느껴지는 통증은 정확히 내 몸인 것을 두 번 세 번씩 인증해주고 있다.   

  

  “그래도 나는 네가 사랑스러워. 피 한 방울 쏟질 않고, 어쩜 그리 야무지게 다쳤니.”     


 예전 같았으면 ‘애매한 재능은 저주’라는 말처럼 나 자신을 도망갈 수도 없는 낭떠러지에 세우고 두고두고 괴롭혔을 것이다. 보는 눈과 귀가 있었던 탓인지,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다.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때때로 말하는 것보다 침묵이 나을 때가 있다. 말하는 것이 말하지 않는 것보다 못한 경우가 얼마나 많던가. 그런 면에 있어서 오늘의 침묵은 승산이 있는 편이었다.


  해묵은 앨범에서 떨어진 사진 한 장이 열두 살 기억을 소환해주었다. 나는 길모퉁이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다소 현란한 무늬로 이뤄진 민소매와 반바지 세트를 입고 있었는데,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었다.

  나는 쓰러졌다. 드라마에서처럼 기억을 잃고 쓰러진 건 아니었고, 그냥 쓰러졌다. 집에 가던 길, 골목길에서 봉변을 당했다. 대부분 사람만 다니는 길이었는데, 그날따라 어떤 차가 나를 따라왔고, 하필이면 내 쪽으로 굳이 와서는 무릎을 치고 도망갔다. 뺑소니였다.

  어느 일요일이었는데, 사람도 없었고 조용했다. 무슨 일을 당한 건지도 몰랐다. 순간, 지나던 트럭 한 대가 쪽지를 주었다. 뺑소니 차량번호였다. 갑자기 나타난 순찰차는 파출소에 나를 내려주었다. 경찰 아저씨는 조서를 꾸몄다. 나는 쪽지에 써진 차량번호를 불러주었다. 이내 하얗게 질린 표정의 엄마가 달려왔다. 나는 침착한 태도로 멍하니 앉아있었다. 멀리 못 간 뺑소니는 합의금을 제시했고, 생각보다 수월하게 끝났다. 사람들은 내 이야기를 듣고, ‘하늘이 도왔다’고 했고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했다. 그래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때처럼 이번에도 피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다쳤다. 그리고 쓰러졌다. 어쩌면 다치는 순간에는 잠시 기억을 잃는 건가 싶다. 파상풍 주사를 맞고, 진통제 주사를 맞았다. 한꺼번에 두 대나 맞으니 얼얼했다. 검푸른 멍이 올라왔고, 심하게 부었다. 얼음팩을 수없이 갖다 대도 아무 느낌이 없을 정도였다. 이틀쯤 지나자, 깁스만 하고 있어도 되는 상태가 되었다. 본격적으로 저릿저릿 아프기 시작했다. 그때부터였나 보다. 밤 열두 시를 기준으로 잠이 들기 위해 무진장 애를 써야만 했다.     


무릎을 베고 누우면

아무 일 없는 듯 그랬던 것처럼

머리칼을 넘겨줘요     


 열두 살과 현재 나이의 중간쯤 되던 시절엔 피를 철철 흘리면서 다친 적이 있다. 절뚝거렸고, 화끈거리는 상처로 쓰라리고 아팠다. 그때는 피를 보았기 때문에, 더 많이 다쳤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쉽게 털고 일어났다. 타박상이었을 뿐, 지금처럼 3주 깁스 진단을 받지는 않았다. 문득 안으로 곪는 상처가 더 큰 것처럼 눈물도 흘리지 않는 게 더 큰 고통이 아닐까 생각해보게도 됐다. 인생은 예상대로 진행되는 시나리오가 없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     



깨우지 말아요 아주

깊은 잠을 잘 거예요     


  모두가 잠든 깊은 밤, 어쩔 수 없는 일에 나 자신을 탄식하고 원망해본다. ‘왜 그랬어, 조금만 더 참지 그랬어, 더 버티지 그랬어.’ 후회하는 메아리는 다시 돌아올 뿐이다. ‘괜찮아, 고생했어. 너무 수고 많았어.’ 하고 나 자신을 안아줄 법도 한데. 그런 따스한 말 한마디 건넬 수 있었다면, 너도 곁에 두고 오래 볼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이 세상에서 나를 지키는 건 오롯이 나 자신뿐임을. 이제 더는 돌아보지 않기로 해.     


 ‘나는 네가 깊은 잠을 잤으면 좋겠어.’


잠들 만큼 딱 그만큼의 통증이었다. 내 아픔이 가시고 나서야 비로소 창밖 너머로 잠들지 못한 수많은 밤이 보였다. 밤이 지나가면 새로운 날이 온다. Life goes on.(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본문에 나눔 고딕체 볼드 처리한 노래 가사 '무릎을 베고 ~ 넘겨줘요' 그리고 '깨우지 말아요~ 잘 거예요' 부분은 싱어송라이터 아이유(이지은)의 <무릎>에서 차용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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