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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지영 Jul 31. 2020

남의 속도 모르면서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더라도,

말하는 사람들은 많아졌는데, 정작 듣는 사람들은 없다. 모두가 자신의 말을 하고, 자신의 이야기만 들어달라고 한다. 모두가 글을 쓰고 싶고 너도나도 작가라고 말한다. 너무 시끄러운 세상이다. 말 한마디로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일이 매일 이곳저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반 고흐, <밤의 카페테라스>의 일부분. 일각에선 흰 옷 입은 사람을 예수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모두 쓸쓸해보이는 건 왜일까.


우리는 왜 이렇게 말하고 싶어 할까.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고, 주목받고 싶어서다. 그래야 뭔가 해낸 것 같고,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이 생존하는 법이라고 생각하니까. 자기 과시하기에 그럴듯한 도구로 적당하고 만만한 것이 언제부터 작가가 된 것일까. 하지만 그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나와 생각이 다르면 그때부터 뉴스피드 분위기가 싸늘해진다. 서로 비방하는 것도 모자라 생트집을 잡아서라도 끌어내리고, 그게 안 되면 차단하고 끊어버리기까지 한다. 일방적인 소통에서 우리는 내 생각을 강요하는 글쓰기에 길들여졌고, 쾌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한계점이 있다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시작점이 다르니까 도착점이 다를 수밖에. 그런데 내 말이 맞으니까 너도 그럴 거야. 그래야만 해. 그게 아니라면 너는 틀렸어. 다른 게 아니라, 틀렸다고 말한다.     


“너는 틀렸어.”     


그다음 하고 싶은 말은 뭐였을까.

‘당연히 내 말이 맞아. 그러니 너는 내 말에 따라줘.’ 였지 않았을까.     


거의 5년 만에 처음으로 드라마를 본방 사수하고 있다. 원래는 호기심이었는데, 그 호기심이 몰입으로 바뀌면서 난데없는 열정까지 불태우고 있다. 하루하루 밥벌이에 신경을 쏟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삶이 이때만큼은 자유롭게 풀어질 수 있다니 놀랍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좀 다르다. 판타지가 없다. 너무 현실적인데, 따뜻하고 사랑스럽다. 너무 서늘하고 무서운데, 그게 꼭 내 얘기 같아서 지켜보고 싶고 응원해주고 싶다. 그래서 자꾸 보게 된다. 나름의 카타르시스도 있다. 이제껏 드라마에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나만 아는 공감이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속마음...


시청자 게시판에 이런 댓글이 있었다.      


‘우습지 않고 현실감 있게 그려내 주어 고맙다. 우리 같은 장애인 가족도 볼 수 있도록 의미 있는 작품을 만들어줘서 고맙다. 진지한 태도로 임해 주시는 배우님께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누군가 내게 말했다. 존재 자체로 기적이 아니냐고.

너는 천사와 함께 있는 거라고.     


그 ‘천사’라는 말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맴돌았다. 인생 멀리서 보면 희극인데,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 직접 살아보고 겪어보지 않았으면서 모든 걸 아는 것처럼 말하는 건 정말 딱 질색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외로운 사람이다. 그 마음의 밑바닥까지 제대로 걸어 본 사람은 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 자신이 느끼는 만큼의 공감을 타인에게 바란다는 건 오만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태도에 더 이상 아무렇지 않은 척 괜찮은 척하고 싶지는 않다. 너무 많이 지쳤다.

마음을 얼마만큼 열어줄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다. 모든 상처를 헤집고 드러냈더니, 그것이 또 다른 가시가 되어 돌아온다. 너도 힘들었네. 비교해보니까 내 아픔은 별거 아니네. 고생했네. 짠하다. 거기까진 좋다. 그런데 발동 걸린 브레이크는 멈출 기세를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내겐 꼬리표가 붙는다.

누구누구의 가족. 결국 그런 프레임으로 바라보는 시선만 남는다. 말들이 무질서하게 앞다투어 쏟아진다. 그야말로 말들의 잔치다. 아무 말 대잔치.    

 

딱히 기분이 나쁜 건 아니다. 늘 그래 왔으니까. 단 한 번도 진심으로 위로를 받아본 적이 없으니까. 그것도 어쩔 수는 없다. 사람은 자신이 느낀 것만큼만 이해하기 때문이다. 다리 다친 사람이 눈 아픈 사람의 마음을 백번 공감 못하는 것처럼 삶 자체가 모순이고, 흑백논리 투성이인 게 많다.


그러다 우연히 보게 된 드라마였다. 사실 나는 이런 이야기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는 자체가 신기했다. 그것도 안방극장에서 모두가 보는 시간대에 초호화 출연진들이 연기한다. 심지어 이야기의 중심에서 극을 끌고 가는 주축이기까지 하다. 항상 화제성에 오르고, 숱한 공감을 낳고 있다. 매번 감탄하고 있다. 좋은 콘텐츠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런 작은 움직임이 모여 사회를 바꾸는 것이다. 그래서 말 한마디와 바른 생각이 더더욱 중요하다.

드라마 Tvn <사이코지만 괜찮아> 중에서.


남의 일이니까 멋있어 보이고, 대단해 보이지 그런데 그것이 내 일이 되면 달라질 것이다. 다르게 생긴 ‘미운 오리 새끼’가 학대를 받았던 것처럼. ‘푸른 수염’이라서 성 바깥으로 나오지 못하는 것처럼. 이미 ‘답정너’로 정해진 한계점이란 존재하는 것이다. 모두가 알지만, 말하지는 않는 ‘주홍글씨’.

원래 물과 기름은 같이 있을 수가 없다. 늘 그렇듯 약한 쪽이 힘겨울 것이다. 갑자기 스며든 기름 한 방울 때문에 오염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물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절대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는 어쩌면 물과 기름이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 하는 지점이다.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둘 다 필요한 존재라면 각자도생 할 수 있는 곳에 두면 된다. 서로의 다름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이다. 만약 그 둘이 함께해야 한다면 같이할 수 있도록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군림하거나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동등한 관계로 받아들이고 존중할 수 있는 마음. 그러나 굳이 누가 이걸 하려고 할까. 나 살기도 힘들고 바쁜 세상인데.      


그래서 진심을 써야 한다.

단 한 줄이라도.     


가짜는 언젠가 들통나기 마련이다.

화려한 껍데기는 요란하기 짝이 없고. 빈 깡통처럼 허전하고 씁쓸하다.     


우리는 스스로 마음을 닫고 돌아서는 사람들에게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기회를 줘야 한다. 아픈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 줄 수 있어야 한다. 이곳이 안전한 곳이라고. 절대 너를 해치지 않을 거라고.

마음 깊이 아파 본 사람만이 아픈 사람의 마음을 만져줄 수 있다는 말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밤이다. 불현듯 한 시인의 말이 스쳐 지나간다.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내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모든 죽어가는 것,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작고 약한 것에 생명이 있다.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새삼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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