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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지영 Oct 08. 2020

오늘 내가 알게 된 것,

훤하게 다 보이잖아요




  “나는 참 투명한 사람이 싫어요.”


 책을 읽다가 문득 톡, 하고 떨어진 책갈피처럼 갑작스레 튀어나온 말이었다. 그 말의 맥락도 분위기도 기억도 나질 않지만, 말 한마디는 또렷하게 남았다. 스치듯 지나쳤던 인연을 맺은 사람들에게 나는 어떤 이야기로 남아있을까.

   유독 그 말 한마디가 내 마음에 남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자기표현이 강하다는 건 어쩌면 상대방에게 자신을 제대로 알리는 방법이기도 하다. 호불호가 뚜렷한 자신에 대해서 알린다는 것 자체가 ‘저는 이런 사람이니, 알아주세요’라는 말을 표현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말이 불현듯 와닿는 순간이 있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빈틈없이 꽉 차 있어서 절대 속마음을 알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눈앞에서는 다정해 보이고, 친절해 보이기도 하지만 사람이 정말 있어야 할 순간에 정작 없어진다. 연락이 뜸해지고, 거리감마저 느껴진다. 그녀에게 나는 자신이 필요한 때, 옆자리를 채워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제야 생각해보니 모든 만남이 그녀의 호출로만 성사되었다. 많은 말을 하지만, 대부분 남의 이야기였고 알맹이는 없었다. 딱 거기까지였다.

  1인 가구가 늘면서 혼자 밥 먹기 좋은 식당도 많아졌지만, 그녀는 혼자 밥 먹는 것이 싫었을 뿐이고, 나 역시 딱히 동네 친구가 없었기 때문에 습관처럼 만났다. 둘 중에서 누군가 상대에게 무언가를 더 원하는 건 선을 넘는 일이었다. 그걸 왜 나는 몰랐을까. 그만큼 나는 그녀를 몰랐고, 내 마음과 비슷하려니 짐작했을 뿐이다. 그것이 큰 오산이었다.

   매일 얼굴 마주치며 같이 사는 가족일지라도 말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말하지 않아도 알고, 눈빛만 보아도 아는 건’ 그저 초코파이情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무를 채 썰어 넣고, 시원하게 모시조개탕을 끓였다. 하얗고 맑은 국물 사이로 유일하게 입을 열지 않은 조개가 보였다. 그게 꼭 사람의 마음 같았다. 어떻게 해서든 마음을 열지 않으려고 작정하면 결코 열 수가 없다. 그 닫힌 마음을 푸는 열쇠는 오직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머릿속으로 ‘투명한 사람이 싫다’는 말을 자꾸 되뇌고 있었다. 언젠가 수족관에서 실핏줄까지 훤하게 드러난 몸으로 활개를 치고 돌아다니는 물고기 한 마리를 본 적이 있다. 물고기는 보이는 그 자체였다. 속일 것도 숨길 것도 없어 보였다. 보이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왜 사람에게서 투명함은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만 드러나는 걸까. 어쩌면 자신의 민낯을 드러내기가 싫어서 입을 꽉 다문 조개처럼 살아왔던 것은 아닐까.

  삶이 각박해지고 복잡해질수록 자연을 생각하게 되고, 옛 친구를 떠올리게 된다. 옛 친구를 만나면 일부러 감출 필요도 없고, 애쓸 필요도 없는 나 자신이 된다. 주변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웃고 울던 순수한 시절이 된다. 그 앞에선 열여덟이어도 되고, 지금의 모습이어도 된다. 너는 너대로가 좋고, 나는 나대로 좋다. 서로 약속이나 한 것처럼 편안해지고, 안정감을 느낀다. 있는 그대로 각자의 나다운 모습이 받아들여진다. 내가 어떤 모습이더라도 받아줄 수 있는 마음이란 걸 우리는 서로 알고 있다.


  그렇지만 모든 관계가 그럴 수는 없는 법이다. 나의 슬픈 일에 무반응으로 일관하고, 나의 기쁜 일에 축하해주지 못하는 사이. 자신이 필요할 때만, 연락하는 사이. 그러다가 점점 멀어지는 사이. 이용 가치가 떨어지면 깔끔하게 정리되는 사이. 이런 사이는 어떻게 정의 내려야 할까. 친구라고 할 수 없고, 지인이라고도 할 수 없다. 딱히 돈을 거래한 사이도 아니다.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관계인지 새삼 생각해보게 되는 지점이다.



  진심으로 투명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과연 몇이나 될까. 언젠가 누군가의 입에서 떨어져 나왔던 그 말은 두 가지 정도로 해석해볼 수 있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투명함이 훼손’ 되었거나 반대로 ‘상대방을 전혀 배려하지 못하는 둔감한 사람에게서 발견한 투명함’에 대한 경멸이었을 것이다. 어떤 쪽으로도 속이 비치도록 맑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 어떤 쪽으로도 말이다. 투명함은 나 자신과 상대방에게 거는 기대, 희망도 어느 정도 포함이 된듯하다.

  투명한 사람이 싫다는 말은 결국 누군가를 향한 비난이었을 수 있지만, 나 자신에게도 하는 말일 수 있다. 나조차도 투명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속이 비치도록 맑다는 건 누군가에게 수를 들킬 만큼 만만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민낯이 드러나도 아무렇지 않은 건강한 사람이 아닐까.




  언제부턴가 나 자신을 지키려면 가면을 써야 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다. 그래야만 거친 세상을 버텨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진짜 맑은 것’이 정작 무엇인지 모른다. 약해지는 건 무조건 생존에 위협이 된다고만 생각했기에 ‘밝고 맑고 속이 비치는 것’은 약점이 되는 거라고 은연중에 받아들이고 숨겼다.

  하지만 맑음은 빛에 가까운 것이지 절대 깊이가 없고 얕아서 버릴만한 것이 아니다. 진심으로 투명하다는 건 누군가에게 감출 게 없고,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도 부끄러울 게 없다는 뜻이다. 결정적인 상황에서 민낯이 드러나더라도 마찬가지로 견고한 상태인 것이다.

  모든 어둠 속에서도 결국 민낯을 드러내는 건 ‘밝은 빛’이다. 빛으로 인해 어둠이 부끄러워지는 것이다. 타인의 기조를 따르지 말고, 나의 길을 가는 것이 잃어버린 민낯을 되찾는 길이라 생각한다. 그러니 애써 용기 내어 투명해졌으면 좋겠다. 완벽하게 감출 수 없는 존재로 지어졌다는 건 비로소 투명할 때라야 진가가 발휘된다는 것이다.




  세상이 다 알아주는 가치 있는 업적을 남겼지만, 직원을 성폭행하고 자살한 정치인의 오명은 평생토록 벗을 수 없을 것이다. 위안부 할머니의 지원금을 몇십 년간 횡령한 이 또한 마찬가지겠다. 이외에도 명명하지 못한 수많은 부끄러움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 살아있는 것이다. 부끄러움을 알아야 사람이다. 그 어떤 것도 숨길 수 없다. 어둠은 수면 위로 올라올 수밖에 없다. 왜냐면 빛이 있기 때문이다.

  속이 비치도록 맑다는 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일까. 그건 아름다운 것을 지키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유난히 하늘이 높고 파랗다. 감이 익어가는 계절이다. 때때로 부는 바람이 차갑지만, 햇살은 참으로 따사롭다. 나도 너도 무르익는 중이다. 누군가에게 거는 희망과 기대마저 없다면 그건 죽은 사회나 다름없다. 아직 우린 할 일이 많다. 그래서 살아내야 한다. 서로를 살려내기 위해서라도, 부디 살아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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