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몇 개의 선>에 얽힌 이야기
세상에 직업이 ‘소설가’ 혹은 ‘시인’ 말고는 없다고 생각하던 시절, 캠퍼스에서 처음 맞았던 봄은 제마다 달리 기억되고 있을 것이다. 나는 밤낮 가리지 않고 부어라 마셔라 하는 그들이 참 싫었는데, 그들도 나를 어느 순간부터 ‘전도사’라고 부르며 멀리하곤 했었다. 그런데 다른 듯하지만 닮아있었기에 언제라도 다시 만나게 될 거라는 걸 나는 그때부터도 느끼고 있었다. 대학에서 만난 우리 세사람은 같은 수업을 듣고, 늘 함께하는 동기였다.
한 사람을 위한 마음
일단 그녀는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 내 앞에 앉아 있었다. 그 이유로 우리는 친해졌다. 수줍게도 보였지만, 술을 마시면 좀 더 목소리가 커지고 말도 많아졌다. 이상스럽게도 위성도시에 산다는 점이 그냥 마음에 들고 편했다. 손글씨가 귀여웠고, 눈 밑에 난 점이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어쩌다가 선배의 강압에 못 이겨 줄줄이 사물놀이패에 들어갔고, 축제 한판만 뛰고 탈퇴하자고 맹세했다. 낮술 하다가 수업에 들어간 적도 있고, 어울려 다니는 것이 즐거웠던 시절이 있었다. 나와는 달랐지만, 은근한 매력이 있던 그녀가 나는 좋았다.
언젠가 친구들과 그녀의 집에 간 적이 있는데, 그녀의 방은 무척 심플했다. 낮은 탁자 위에 컴퓨터가 있었고, 구석엔 쌓아 올린 소설책이 가득했다. 책 옆으로는 KGB 병맥주가 다섯 병 정도 나란히 놓여 있었는데, 제법 어울렸다. 치우기 싫어서 뒀다는데,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그녀는 소설가였는지도 몰랐다. 그렇게 밤이 새도록 마셔 댔는데, 다음 날 아침에 직접 구워준 오겹살과 푸짐한 두부김치는 정말 인상적이었다.
“이거 네 거 맞지?”
매일이 술이었던 스무 살 대학 생활은 내게 참 버거웠다. 언젠가 선배 몇 명과 동기 몇 명 해서 삼삼오오 학교 앞 주점에 있었다. 평생 안경잡이로만 살다가 멋 좀 부려본다고 끼기 시작한 ‘하드렌즈’는 내게 정말 하드(hard)했다. 살짝 바람만 불어도 눈이 빨갛게 충혈됐다. 다른 사람들은 괜찮은데, 난 왜 이런 거야. 이뻐진다는 건 이렇게 눈물 나는 일인가. 무튼 그랬던 것 같다.
화장실에서 하드렌즈를 빠뜨린 모양이었다. 나는 분명 눈이 있었지만, 내 눈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걸 그녀가 찾아준 거였다. 그녀가 은인처럼 느껴졌다. 마음속으로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 술이 들어가면 제법 농담도 잘하고, 웃기도 잘하는 그녀와 가까워지려면 결국 술이 필요했다. 나름의 같이 할 명분을 찾고 싶었다. 그러다가 생각한 것이 ‘성(性) 박물관’ 가기.
스무 살 여대생의 나들이 장소라고 하기엔 좀 뭐 했지만, 호기심이 한창 넘치던 때라 꼭 가고 싶기도 했었다. 구체적으로 약속을 잡지 못해서였을까. 아니면 그날 성격검사(mbti)에 데려가서였을까. 생각했던 것처럼 낭만적이고 순탄하지 못했던 대학 생활을 지켜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나는 나를 지켜야 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녀와 점점 멀어졌다.
그때 나는 나 자신을 잘 몰랐고, 그때부터도 자신을 잘 알고 있었던 그녀는 성격검사에서조차 반대 성향으로 자리를 자꾸 옮기게 되었다. 왜 자꾸 같은 성향끼리 모이라는 건지, 그게 아니었다면 좀 더 친해질 수 있지 않았을까. (나중에 검사해보니 나는 그녀와 한 가지 성향만 달랐다. 그때 나를 좀 더 알았더라면...)
서로가 싫어서도 아니었고 어쩔 수 없이 각자대로 살아가게 됐지만, 한 번씩 생각하게 되는 친구였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 마음이 그랬다는 것이다. 평소엔 말이 많은 편이 아니어서 어쩌면 말을 아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그녀가 먼저 말을 걸어왔던 적도 있었다. 문학기행을 같이 가자는 것이다. 나는 고민을 했다. 다녀왔어도 좋았을 것 같은데, 그때는 왠지 가면 안 될 것 같아서 피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나는 휴학했고, 그녀는 제때 졸업했다. 우리는 서로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다. 나는 날개 잃은 나비처럼, 정처 없이 헤매었다.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할까? 뭐하면서 먹고 살아야하지? 살기 급급해 펜조차 꺾어버릴 지경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듣자하니, 그녀는 대학원에 진학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러나 정확한 건 알 길이 없었다. 나 혼자 버티기만도 버거운 삶이었다. 누군가의 소식이 귀에 들어올 리 없는 그런 시간들이었다. 생각지 못하게 정말 오랜만에 그녀를 다시 만났던 자리는 안타깝게도 그의 장례식이었다.
몇 개의 선
이제부터는 언제부턴가 늘 마음 속에 남아있던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동기들 사이에서 '손'이라고 불리기도 했던 그의 느닷없는 부고(訃告)는 인터넷에서 쪽지로 날라왔다. 다들 믿지 않는 눈치였다. 처음에 나도 그랬다. 잘못 보낸 거겠지. 장난이겠지. 스팸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스팸 쪽지이기를 바랐다.
딱 한 번 구일역에 내려 본 적이 있다. 그곳에 그의 장례식장이 있었다. 그때 우리는 고작 스물셋밖에 되지 않았고, 주변인의 죽음을 경험하기엔 어린 나이였다. 그 또한 스물다섯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투신자살이라니, 이런 죽음은 처음이었다.
'명이 짧은 애였어요...'
태어났을 때부터 약했고, 오래 살지 못할 거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이름 뜻도 '오래 살라'고 지어준 거라 했다. 난생 처음보는 그의 아버지가 말했다. 부모를 등지고 떠나는 막내 아들의 마음이란 어떤 걸까. 그런 아들을 망연히 바라볼 수 밖에 없는 부모의 마음이란 어떤 것일까. 그에게는 나이 터울이 있는 누나가 두 명 더 있다고 들었다. 나름 집에서 이쁨 받고 자란 막내였을텐데... 장례식장에서 알게 된 그에 대한 정보는 낯설거나 느닷없거나 둘 중 하나였다. 오열하고 쓰러지시는 어머니 분을 부축해드리면서 나는 자리에 앉았다. 이럴 때 입으려고 산 원피스가 아닌데, 검은색은 이거 하나라 입고 왔건만 오랜만에 동기들이 이 옷은 어디서 난거냐며 이쁘다는 말까지 했다. 마음에 드는가했다. 벗어주기라고 해야되나. 갑자기 동기 한 명이 나오더니, 내 이름을 불렀다. 서류 봉투에 내 이름만 적혀져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나는 그가 군대에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동기들은 글 좀 쓴다 하는 친구들이 대부분이었고, 예전부터 백일장에서 서로 알고 지내던 특기생도 있었다. 외관상(?) 내면상(?) 좀처럼 알 수 없는 특이한 캐릭터가 많았지만, 그는 그중에서도 손에 꼽을만했다. 그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늘 구석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또래가 잘 소화하기 힘든 옷을 입고 다녔다. 소위 패션 테러리스트라고 할 수 있었는데, 깡마른 몸에 개량한복이라도 입고 오는 날엔 처량해보이기까지 했다.
그는 사실 우리와도 잘 어울리지 못했다. 한 번씩 말을 걸어주면 이상한 소문이 돌기 일쑤였고, 그러다 보니 눈치만 보기 바빴다. 수업시간에는 집중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늘 구석에서 그림을 그렸고 손금을 봐주기도 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그가 군대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별명은 손오공이었다. 신기하기도 했고,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맞다. 그는 우리에게 알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글을 썼다. 그리고 꽤 여러 개의 학회 소그룹을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간혹 ‘난해하다’는 평을 듣기도 했지만, 별로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 무덤덤해보였고 오히려 태연해보였다. 모든 수업이 작품 발표와 합평이다보니, 칭찬보다는 지적질이 난무해서 분위기가 사나운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러나 그는 어떤 말에도 끄덕 없어 보였다.
그는 동기들에게 책 한 권씩 선물을 해줬던 것 같은데, 나는 그에게서 두 권의 책을 선물 받았다. 서정인의 <강>, 듀나의 <태평양 횡단 특급>! 너무 색깔이 다른 책이었는데, 내 취향도 아니었지만, 딱히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못 했다. 그래서 나는 보답하는 마음으로 동아리 모임에 초대를 한 적이 있었다. 그는 자기는 무교지만, 여기는 꽤 따뜻한 곳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자신은 무교인 게 좋다고도 말했다. 그날 찍은 단체사진에서 그의 연두색 잠바가 유독 튀었다. 무표정한 얼굴이 어색해 보이지만은 않았다. 나름의 에피소드라면 그 정도였다.
영정사진의 모습은 참 낯설게 느껴졌다. 짙은 눈썹에 쌍꺼풀 짙은 눈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거의 처음이라면 처음인 장례식이어서 어떻게 인사하는지도 어디에 꽃을 놓는지도 몰랐는데, 하필이면 그게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진 한 수업을 듣던 동기라니. 어떻게 생각해도 진정이 되지 않았다. 지금 떠올려도 그곳에 어떻게 갔었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조차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영정사진을 본 어떤 친구는 이 오빠가 이렇게 잘생겼는지 몰랐다고도 했다. 믿기지 않아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멍하니 있다가 울음을 터트리는 친구도 있었다.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옆에 있던 친구가 물었다.
"왜 서류봉투에 네 이름이 있었을까?"
"글쎄. 나도 모르겠어. 소설 한 편을 더 안보내서 그랬나..."
"쟤는 간만에 봤는데, 왜 저렇게 호들갑이니? 너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러니까 말이야."
그뒤로, 그는 한동안 내 꿈에 나왔었다.
'그때 왜 내 전화 안받았어?'
한번 바빠서 받지 못한 적이 있는데, 죄책감이 느껴졌다. 그가 꼭 그렇게 내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그는 군대에서 동기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최근에 쓴 글을 보내 달라고 계속 독촉하길래 창피했지만, 등기 부쳐 보내 주기도 했다. 그랬더니 냉큼 코멘트까지 적어서 다시 보내 주었다. 그만큼 문학에 열정이 많았고, 문학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리고도 몇 번을 전화했다. 나는 그 전화를 받지 못했다.
그는 제대를 두 달 앞두고, 자택에서 투신자살을 했다. 휴가를 나와서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어쩌면 오래 전부터 생각했던 것일까. 7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렸다는데, 아무리 들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미니홈피에 그는 여전히 살아있는데, 어디선가 글을 쓰고 있을 것 같은데. 너무 오래 전 일이라 이제는 흐릿한 기억도 있다.
그가 내게 별명 아닌 별명 하나를 지어준 적이 있다.
변화 지고 영광.
나름 삼행시를 지어준 거였는데, 의미도 있어서 오래 기억하고 있다. 어쩌다 보니 그것은 그가 내게 남긴 마지막 한마디가 되었다. 그는 내가 글을 쓰길 바랐다. 그리고 나는 이제 그보다 더 오랜 세월을 살았다. 이렇게 사는 게 맞나 싶기도 한데, 나는 여하튼 살아있다. 그렇게 그는 각자 다른 의미로 동기들의 마음 속에 남았다.
불현듯 그녀의 첫 소설집에서 그를 만나게 된 건 우연이었을까. 서로의 기억은 조금씩 달랐지만, ‘자책감은 느끼는 게 아니라, 가지는 것’이라는 표현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그녀도 그를 아주 오래 기억하고 있었다. 서글펐다. 지난 시간들이 떠올라서 그저 울 수밖에 없었다. 소설가가 된 그녀의 단편소설엔 모든 인물이 한 사람인 것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술을 마셔댄다. 곱씹어보니, 막상 그 모습이 내가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술 없이 맨 정신으로 살기 힘든 사회를 우리는 살고 있지 않던가.
언제나 그랬듯,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여전히 그의 죽음은 의문스럽고, 알 길이 없지만 산 사람은 또 살아야해서 산다. 그때 그 장례식장에서는 육개장 한술도 뜨지 못했지만, 그 다음부터 다녔던 장례식장에서는 제법 밥을 잘 먹었다. 어제 무슨 일이 있어났대도 오늘의 나는 아침밥을 먹고 또 일을 하러 간다. 그게 삶이다. 한동안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지만, 우리는 그렇게 많은 세월을 살아냈다.
'특별함에서 건져 올린 보편성의 획득.'
한 평론가가 기대했던 그 말을, 작품 세계를 이뤄가는 것으로 그녀는 답하고 있었다. 언젠가 학교에서 하릴없이 그녀와 주고 받았던 말이 있다. 그때는 무슨 맥락에서였는지 기억조차 나질 않는데, 이 말은 또렷했다.
‘우리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
'제발... '
그때 우리는 서로를 등 지고, 각자 주어진 지구 반대편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끊임없이 걸었다. 그런데, 나는 알고 있었다. 다시 만나게 될 거라는 걸. 인생은 곧잘 뛰어도 제자리라지만, 제자리에만 있어도 다행이라지만. 무튼 우리는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것이다. 그녀와 나는, 나와 그는, 그와 그녀는. 그렇게 우리 모두는. 그때, 만나면 할 말이 많을 것 같다. 한마디 꼭 하고 싶다.
'잘 버텨줘서 고마웠다고...'
* 본문에 쓰인 소제목 <몇 개의 선>, <한 사람을 위한 마음> 은 이주란 작가의 단편소설 제목을 차용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