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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지영 Oct 26. 2020

단 하루만 행복한 날

매일 생일처럼 살 수 있다면

  생일을 생각하면 설레서 잠도 못 자고 했던 그런 날들이 있었다. 뭘 먹을까 뭘 받을까 행복한 고민이었다. 그날만큼은 좋은 말해주고 챙겨주니까 어린 마음에도 그게 참 좋았던 거였다. 그런데 평소는 왜 그렇지 않을까. 여느 날과 다르지 않은 평범한 날일 뿐인데, 생일은 왜 그렇게 따뜻하고 포근한 걸까. 반면 매일 주어지는 하루는 왜 그렇게 따분하고 똑같기만 할까. 웃을 일도 없는 무표정한 하루의 연속이었다.



  

  직장에서는 점심만 기다렸고, 점심을 먹고 나면 퇴근 시간이 오기만 간절히 바랐다. 출근할 때부터도 퇴근이 간절했다. 하루의 목표가 퇴근인 그런 날들이었다. 지겹고 지치고 지루한 하루였다. 퇴근 무렵, 제일 듣기 싫었던 말은 ‘내일 봅시다’였고, 내일이 오는 것이 몸서리치게 싫었다. 역시나 주말은 너무 짧았고, 월요병은 견디기 힘들었다. 목표도 없고 재미도 없고 삶의 낙이 없는 일상이었다.

  순간, 깨달았다. 나는 먹기 위해서 태어난 존재라는 걸. 꿈 따위 없었다. 내가 살아야 할 목적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냥 오늘의 양식과 오늘 하루에 족했고, 잘 먹고 잘 자면 된다고 생각했다. 태생 자체가 그렇게 단순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단순하게 살지 않으면 단 하루도 견딜 수 없었기에 나 아닌 척 억누르고 꾸역꾸역 버텼다. 나는 그저 누군가의 필요로 소비되는 기계일 뿐이었고, 그 누군가가 원하는 기대치만 적당히 충족시켜주면 되었다. 그러면 또 아침을 먹고, 점심을 먹고, 저녁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먹기 위해서 사는 삶이 유지가 되었다. 그뿐이었다.     


  “너는 삶의 목표가 뭐야?”
  “사랑이지.”     


  할 말이 없어서 던진 질문치고는 의미심장했고, 되돌아온 답변은 철학적이었다. 그때, 나는 ‘왜 사는가?’에 대해서 질문했던 것 같고, 그 친구는 삶의 목표가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내내 생각하게 되는 대화였다. 스물엔 그런 생각도 하고 살았는데, 서른이 지나면서부터는 생각도 멈춰버렸다. 그저 오늘 먹고 살아갈 양식이면 충분했다. 때때로 그런 내가 꿀꿀이 같다는 생각이 들어 억지로 헬스장에 가고, 필라테스를 끊고 그랬다. 그런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몸이 살찌지 않았다고 꿀꿀이가 아닌 건 아니었다. 나는 뼛속 깊이 꿀꿀이로 살고 있었다. 마지막 자존심이라도 챙기고 싶었다. 그게 다였다.      



  문득 ‘사랑하기 위해서’ 살아간다던 그 친구의 오늘이 궁금해졌다. 그만큼 인류애가 짙은 사람이라면 이미 결혼은 했을 테고, 다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항상 웃는 얼굴이었던 그 모습 그대로라면 주변 사람들도 잘 챙기고, 사랑하는 삶을 실천하고 있겠지 싶었다. 말하는 대로 삶은 수정되어간다고 하던데, 꿀꿀이의 삶을 지향한 적도 없던 나는 어느 순간부터 생각을 멈추고 식욕으로 살아오게 된 걸까. 아무 의욕도 없이 무기력하게 사는 것보단 분명 나을 것이다. 식욕도 살고자 하는 욕구가 만들어 내는 가장 원초적인 욕구니까 말이다. 맞다. 사람이 먹는 재미마저 없다면 이 팍팍한 세상을 어찌 살겠는가. 그건 정말이지 맞는 말이다. 그런데 같은 밥 먹고 같이 나이 먹고살면서 너무 다르게 사는 건 아닌가 생각했다.     




   주말 빼놓고는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이 전부였다. 한숨이 턱턱 나오는 날들이었다. 하지만 그 많은 시간 동안 내 머릿속을 채우는 건 ‘메뉴’와 ‘퇴근’뿐이라면 점검이 필요했다. 누군가에게 도움도 주지 않고 바라지도 않고 그저 먹기만 하는 삶은 ‘개돼지’처럼 느껴졌다. 불현듯 떠올랐던 그 말 한마디가 내게 각성제처럼 다가왔다. 한 모금 마시고 단 한숨도 잘 수 없었던 커피 같았다. 어떤 이유여서였는지는 몰라도, 확실히 나는 모든 걸 억누르고 살아왔다. 나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꿈도 있었고, 소망도 있었는데, 언제부턴지 모르게 까먹고 살아왔다.


  처음의 목표는 ‘살기 위해 먹자’ 였는데, 이상을 좇느라 밥을 굶는 일은 못하겠다는 생각에 접을 수밖에 없었다. 위대한 예술작품을 남긴 작가로 살고 싶었지만, 그들처럼 가난하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만큼의 재능도 없었고, 그만큼의 용기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음 목표는 ‘남들처럼 살자’로 잡았다. 타인에 뒤처지지만 않아도 괜찮은 인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파파라치처럼 그들을 좇았고, SNS에 올라오는 건 무엇이든 따라 하면서 살았다. 그런데 그것도 쉽지 않았다. 뱁새가 황새 쫓으려면 가랑이가 찢어진다더니, 사타구니가 너무 아팠다. 그래서 포기했다. 그다음 목표는 ‘밥은 먹고살자’가 되었고, 그걸 꾸준히 지키다 보니 ‘먹기 위해 산다’가 되었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나름 유서 깊은 ‘생활의 목적’인 것도 같다. 하루아침에 개돼지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오늘을 맞았다.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나는 기준치에 도달하지도 못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나의 삶을 이끌어온 것이 ‘먹이라는 것은 추호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사랑이 어디 밥 먹여 주니?’     


  신파 드라마에나 나올법한 이런 대사로 맞받아칠 만도 한데, 스물한 살의 나는 친구를 동경했었다. 왠지 ‘삶의 목표는 사랑’이라고 말한 그 친구는 나보다도 더 잘살고 있을 것 같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말이다. 지금껏 예감했던 것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는데, 친구를 생각할수록 확신은 더해졌다. 일단, 마음이 풍요로우니 얼굴이 밝고 명랑할 것이다. 주변 사람을 사랑하려면 자신부터 사랑할 줄 알아야 하니까 자기 관리도 잘해서 몸도 건강할 것이다. 그리고 그 풍성한 에너지를 나누기 위해서 부단히 공부하고 노력했을 것이다. 친절하고 예의 바르고 실력도 갖추었을 것이다. 자신을 잘 지켜야만 주변 사람도 챙길 수 있다는 걸 잘 아는 사람일 테니까 말이다. 사랑할 줄 아는 사람들이 꾸린 가정은 웃음이 넘치고, 화기애애할 것이다. 부모와 자식 간에 대화가 풍성하고, 이웃 사람들과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일 것이다. 그림이 그려질 것처럼 선명했다. 참으로 풍성한 삶이다.     


사랑은 표현하고 흘려보내는 것, 사랑을 제대로 받아본 사람만이 진짜 사랑을 할 수 있다. 우리 속에 숨겨진 상처받은 내면 아이도 사랑을 배우고 치유받을 시간이 필요하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받고 있지요.’     


  나이가 들어갈수록 생일은 부담이 될 때가 있었다. 조용히 지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누가 나를 생각해주는가 싶어서 예민해지기도 했다. 기다렸던 연락이 안 와서 섭섭하기도 하고, 생각지도 못한 연락이 와서 어찌할 바를 모르기도 했다. 똑같은 말을 듣더라도 생일에 들으면 다르게 느껴졌다. 상대가 내게 해주는 말이 궁금했다. 단순히 ‘축하해’ 보다는 어떤 진심을 듣고 싶어서였다. 나는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나의 삶은 어떤 의미인지를.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일지를. 하나씩 꺼내어 듣고 싶었다.


  자살하는 사람들이 죽는 이유는 그들에게 관심 가져준 단 한 사람이 없어서라고 한다. 말 걸어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죽지 않았을 것이다. 누군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다. 그 말 한마디를 듣고 싶어서 일 년을 하루처럼 기다리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생일이라면 들을 수 있겠지. 그런 기대로 생일을 기다렸다. 대부분은 들을 수 없었다. 사랑에 굶주린 아이는 너무 커버렸고, 사랑을 줘야 할 부모는 커버린 아이를 향해 다른 기대만 했다. 그게 어른 대접이었다. 하지만 마음속엔 다 자라지 않은 상처 받은 아이가 함께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다 안다고 생각하지 말자. 절대 표현하지 않으면 1도 알 수 없는 게 사람 마음이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표현에는 더욱 너그러워져야 한다.      

  사랑은 받아본 만큼 사랑을 할 수 있다. 이건 강아지도 아는 것이다. 사랑받아 본 강아지는 주인을 위해 죽음을 불사하며 충성을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내가 원하는 만큼의 사랑이 상대에게서 오지 않는다고 해서 원망할 수는 없다. 사람은 배운 만큼만 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끊임없이 서로에게 배우고 좋은 영향을 끼쳐야 하는 것이다.




  이제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제법 케이크에 꽂은 초의 개수가 많아지면서부터는 떨어지는 낙엽처럼 쉽게 쓸쓸해졌다. 어쩌면 21세가 되기 전부터 나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의 삶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말이다. 그래서 결심했다. 갑자기 마음이 커져서 인류애가 넘치는 사람이 될 수 없겠지만, 그저 주어진 것을 사랑하고 표현하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매일 생일처럼 살 수 있다면 하루하루가 얼마나 풍요로워질까. 서로 세워주고, 격려해주고, 사랑을 표현해주고, 사랑을 나눠준다면 어떨까. 서로의 존재 자체를 고마워하고 서로의 소중함을 느끼게 이야기해주면서 말이다. 불화가 생겨도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을 텐데, 누군가의 말에 짓눌리지도 않고 인격적으로 대화할 수 있을 텐데. 우리 안에 사랑이 있다면 말이다. 단 하루뿐이더라도 그렇게 살면 좋겠다. 나에게도 꿈이 생겼다. 갑자기 꿈이 되어버렸다. 그건 누구도 할 수 없다. 오직 사랑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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