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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지영 Oct 13. 2020

제발 가만히 있어요

아무것도 '하면' 안됩니다

    무릎인대를 다쳤다. 벌써 한 달째다. 별다른 처방이 없다. 그저 인대를 쓰지 않으면 된다고 한다. 그야말로 세상 간단한 처방이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했다. 아무것도. 그 말속엔 왠지 여러 가지 뜻이 있는 것 같다. ‘어디 돌아다닐 생각일랑 일절 하지도 말고, 집에서 콕 박혀서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혹은 ‘가만히 기다리면 언젠가 될 거야’ 그런 말 정도가 아닐까. 나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날씨는 날이 갈수록 좋아지는데, 집에만 가만히 있으려니 이참에 이름도 ‘가만히’로 바꿀까 싶다. ‘깊이 생각하고 빼어난 마음으로 살라’고 지어주신 이름에 걸맞지 않게 종일 ‘가만히’만 있으려니 개명 신청하는 게 차라리 나을 것만 같다. 요즘엔 개명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지 않던가. 물려주신 이름을 바꾼다고 해서 어제의 ‘가만히’가 오늘의 ‘가만히’와 다르지도 않을 텐데 뭐 그렇게 작은 것 하나에 핏대 세우고 했나 싶다. 생각해보면 세상엔 시간이 지나야 해결되는 문제가 더 많은 것 같다.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는데, 안달복달 못하던 순간들의 나 자신이 참 안쓰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지금까지 크고 작게 다치고 아프면서 많은 의사 선생님을 만나왔다. 대부분 책임회피에 가까운 말이 많았는데, 그중에서 가장 듣기 싫었던 말이 ‘예후가 좋지 않습니다.’라는 말이었다. 그 말은 곧, ‘너의 미래는 내가 책임져줄 수 없으니 바짝 긴장해라. 고생은 네가 하는 거지 내가 하는 거냐’ 정도로 들렸다. 맞다. 아픈 사람만 억울한 거다. 피해자만 억울한 거고, 상처 입은 사람만이 그 아픔을 아는 법이다. 그러면 난 정말 ‘가만히’ 있으라는 말에 잠자코 있기만 하면 되는 걸까. 솔직히 별다른 뾰족한 수도 없지 않은가. 달리 생각해보면 병원도 가지 말고, 집에만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했다. 하루 중에서 유일한 외출이 병원을 오가는 일인데, 그나마도 없으면 나는 문지방에 온몸이 찰싹 붙어버릴지도 모르겠다. 생각만 해도 우울했다.

  집에서 횡단보도 하나만 건너면 병원이 있다. 그런데 그게 요즘의 나에게는 최대 난코스다. 날이 갈수록 보행 신호 시간이 짧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예전엔 뛸 수라도 있었는데, 이젠 그렇게 할 수조차 없으니 총체적 난국이다. 신호가 바뀌기 전까지 더듬더듬 걸어야만 겨우 넘어갈 수가 있다.


  

  횡단보도에 나 혼자만 있으면 더욱 공포스럽다. 요즘엔 교통법이 개정된 건지 원래 그렇게들 살아왔던 건지 ‘사람 없다’ 싶으면 바람을 가르며 돌진한다. 비 오는 날엔 그런 차들 덕분에 빗물 여러 번 뒤집어썼다. 낙엽이 지면, 이젠 모래바람과 낙엽을 같이 날려주시려나. 흡사 자동차 CF의 한 장면이 연출될 수도 있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나는 이편에서 저편으로 내 위치를 옮겼다.

  내가 사는 곳은 횡단보도 하나만 건너면 광역시에서 경기도로 진입이 된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막 경기도에 두 발로 걸어 진입한 것이다. 생각해보니 꽤(?) 먼 길을 매일 지나다니고 있었다. 때문에 ‘가만히’ 있을 만도 하다고, 받아들일 구실을 찾아보기도 했다. 집에서 나와 병원까지 가는 10분도 안 되는 짧은 길이 요즘 내게는 1시간처럼 느껴지기도 하니까 말이다. 어느 책에서 읽은 것 같다. 우리가 느끼는 시간은 언제나 상대적일 뿐이라고. 똑같은 상황이어도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시간을 살아내는 듯하다. 내가 아무렇지 않게 무료하게 낭비한 하루가 누군가에게는 생의 간절한 마지막 날이라면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다.





  나는 ‘가만히’ 누워서 침을 맞고, ‘가만히’ 소리 없는 눈물도 찔끔 흘렸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삶은 아무리 생각해도 부끄러운 일이다. 그건 그 누구보다도 내가 제일 잘 안다. 한때, 세상의 소음이 싫어서 혼자 ‘가만히’ 사는 삶을 선택한 적이 있었다. 파르라니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될 용기는 없었고, 평생 수절하며 수녀로 살아갈 용기도 없었다. 

   그저 내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을 뿐이다.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스스로 나는 멈춰 있었다. 그랬더니 정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없었다. 그만큼 아무런 성장도 없었다. 그때, 나는 신이 있다는 걸 느꼈다. 스스로 멈춰 있기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을 뿐인데, 정말로 기도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가만히’만 있다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도 몸소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내 힘으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어쩔 수가 없었다. 그때는 정말이지 힘이 없었다. 몸을 못 움직일 만큼 아픈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속세를 떠나 혼자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도무지 희망이 없었다. 그 마음은 내가 갖고 있던 의욕마저 가져가 버렸고, 그야말로 나는 ‘멈춤’ 상태가 되었다. ‘가만히’ 있다는 건 인생의 모든 일을 멈춘다는 다른 표현이기도 했다.



  

그 후, 나는 어떤 시간을 보냈을까. 멈춰 있었던 시간만큼 두 배로 뛰어다녔다. 발등에 불이 붙은 것처럼 미친 듯이 뛰어다녀야 했다. 사람들을 좇기가 버겁고, 벅찼다. 겪어야 할 시행착오는 모조리 겪었다. 진심으로 거저 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찬스’나 ‘건너뛰기’는 게임에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스스로 ‘가만히’ 멈춰 있던 시간이 내게 알려준 것도 있다. 감을 먹으려면 감나무에서 감이 떨어지기만 기다리며, 입 벌리고 누워있기보다는 행동을 취해야 한다. 물론 바로 감을 따지 못할 수 있다. 그래도 간절하다면 어떤 행동이든 ‘하게’ 된다. 그것이 열매를 수확하는 자연의 순리다. 간절하다는 표현은 자칫 ‘간절’에만 초점이 맞춰지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상 ‘하다’를 실행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면 ‘간절하다’라는 형용사는 애초부터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몸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걸 깨달았다. 무릎을 다치고 나서야 무릎의 소중함을 알게 된 것처럼, 세월을 보내고 나서야 알게 됐다.     



  “그렇게 살다가는… 몸이 남아나질 않겠어.”     



  게임처럼 불사신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두 번 죽고, 세 번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면 후회도 덜할 것이다. 내가 다쳤지만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고, 눈치를 볼 필요도 없으니까 말이다. 바라는 건 그뿐이다. 그런데 인생은 게임이 아니었다.




  오늘도 나는 집에서 ‘가만히’ 있었다. 병원을 다녀오는 것 외엔 내 방에서 ‘가만히’ 있었고, 앞으로도 ‘가만히’ 있을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간단히 챙겨 먹고, 책상이 있는 내 방으로 출근한다. 온라인 세상에 접속한 뒤, 제일 먼저 이메일을 확인한다. 그리고 내게 주어진 업무를 하나씩 치워낸다. 사무실에서 하사해주신 데스크톱 웹캠 카메라로 비대면 회의도 하고, 안부도 묻는다. 틈틈이 강의도 듣고, 책도 읽곤 한다. SNS를 하고 사람들과 소식을 주고받는다. 그러다 보면 저녁이 되고, 또 아침이 밝는다. 매일 해가 뜨고 지고 하는 것처럼 단조롭게 반복되는 내 일상은 결코 ‘가만히’만 지나가지는 않는다.


  똑같은 것 같지만, 단 하루도 같은 날이 없다. 설익은 홍시가 하루 새 바짝 익어 단맛을 풍미하는 홍시가 되기도 하고, 생각지도 못하게 누군가로부터 생각지 못한 칭찬을 받을 수도 있고, 밑도 끝도 없이 별것 아닌 일에 뾰족해져서 날카로워질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어제의 ‘가만히’가 오늘의 ‘가만히’와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하루는 조금씩 계속 흘러가고 있고,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다.




  나 홀로 멈춰 있던 시간이 없었다면, 나는 스스로 닫은 문을 열고 나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야말로 ‘가만히’ 멈춰서 한동안 눈물 젖은 밤만 지새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스로 멈춰 있었고, 다시 일어섰던 시간도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나 자신도 존재할 수 있었다. 상처를 극복하는 힘도, 버틸 수 있는 마음도 지나온 시간을 통해 배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한다. 인생에서 버릴 시간은 없다. 존재하는 한 우리는 각자의 시간을 각자의 방법대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일렬로 줄 세우지 말고, 사람을 똑같은 기준으로 바라보지 말고, 가장 나답게 살 수 있도록 해주었으면 한다.

  가능하다면 각자에게 주어진 인생의 시간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가만히’ 기다려주었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스스로 나 자신을 안아주었으면 한다. 지나간 것은 그대로 두고, 후회보다는 다독임이길 바란다. 충분히 괜찮다고, 잘하고 있다고, 참으로 애썼다고. 그 마음으로 현재 마주하는 일도 앞으로 다가올 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단단한 마음이 되길 바랄 뿐이다.






  살아간다는 건, 어쩌면 수많은 ‘멈춤’과 ‘가만히’의 반복 일지 모른다. 잠시 쉬어간다고 해서 인생에 공백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지구가 두 쪽 나는 것도 아니다.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수많은 ‘움직임’이기 때문에 멈춘다는 행위 하나만으로도 죽은 목숨이 된 것처럼 불안에 떠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다 영원히 내 삶이 끝나면 어쩌나 생각하기도 한다. 그래서 더 두려워하고 걱정하는 것이다. 삶은 역동이다. 무기력하게 ‘가만히’ 멈춰 있던 나와 ‘가만히’ 있게 된 오늘의 나는 결 자체가 다르다. 나는 움직였고, 수없이 뛰어왔다.

  깜박거리는 횡단보도 앞에서 나는 생각했다. 멈출 때가 있고, 움직일 때가 있음을. 그것이 인생의 순리임을. 여전히 고민하고 있다. ‘가만히’ 있어야만 하는 상황에서 ‘가만히’만 있지 않을 용기를 낼 것인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멈춤’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지. 이제 선택은 내가 ‘하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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