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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지영 Oct 11. 2020

나는 조용히 살고 싶다

소리 없이 살고만 싶다

  이상한 마음의 연속이다. 세상 조용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매일 한다. 적막을 끼얹은 것처럼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 혼자만의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 제발 조용히 좀 해 줘. 몇 번을 소리쳐도 아무 소용이 없다.

  서로 다른 말을 한다. 동시에 계속 말한다. 문제는 화자나 청자 모두 듣지 않는다. 그 말을 들을 생각도 들어줄 생각도 없다. 서로 알아듣지 못할 뿐이다. 매일 원하는 바를 말한다. 그런데 그 말이 내게는 말로 들리지 않는다. 콘크리트를 부실 때, 나는 기계음처럼 규칙적으로 요란하고 시끄럽게 들린다. 그의 말은 소음일 뿐이다. 세상에 그 목소리만 없어지면 살 수 있겠다 싶다. 그에게 들리는 내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존재 자체가 서로에게 소음이었다. 목적지 잃은 소리의 파장은 낯선 하모니를 만들었고, 마음에까지 깊은 주름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러다가도, 세상 끝날 것처럼 떠들다가도 한순간에 조용해지는 순간이 올 때도 있다. 신기한 건 동시에 떠들고, 동시에 그친다는 것. 둘 중 하나 목소리를 낮추면 소리도 사라진다. 그런 일이 있기나 했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고요한 적막의 순간이 찾아온다.

  그런데 이상한 마음이 또 한 번 찾아온다. 그렇게도 원했던 조용한 세상인데, 막상 얻게 되니 심드렁해진다. 세상 조용하고, 방 안에서 나는 소리라곤 키보드 자판 두들기는 소리뿐인데 외롭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다가 다시 글을 쓴다. 조금 달라도 괜찮다고 말하면서 정작 받아들이지를 못한다. 나 역시 한 입으로 두말하고 있다. 외로운 그들에게 위로가 되겠다고 했지만, 나는 그저 내 마음 하나를 지키지를 못하고 있다. 그렇게 나약한 사람이다.     




  모두의 하루가 끝난 밤, 억지로 잠들려고 모로 누웠다. 약 한 줌을 입에 털어 넣고 잠들었다. 3시간쯤 뒤척였을까. 그녀는 냉장고에 먹다 만 냉동 피자 세 조각을 단숨에 꿀꺽했다. 그리고 다시 잠든 것 같더니, 1시간 만에 다시 일어난다. 그러더니 냉장칸에 있던 케이크를 꺼내서 한 손으로 우걱우걱 집어 먹었다. 저렇게 먹어도 괜찮을까.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다음 날, 그녀는 간밤에 다녀간 하이에나의 습격을 생각한다. 냉장고에 남겨 두었던 케이크와 피자가 온데간데없다. 그러다 자신의 손을 보고, 그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소리 없이 흐느껴 울었다. 공황장애와 우울증을 동시에 앓고 있던 그녀가 잠들기 위해선 안정제 처방이 필요했다. 안정제는 그녀에게 잠을 주었지만, 대신 기억을 가져갔다. 그녀는 자신이 잠든 모습이 담긴 영상을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소리도 나지 않게 울었다. 그녀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영상만이 그녀를 관찰하고 있었다.


한때, 대중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던 걸그룹이었던 그녀의 느닷없는 고백은 장내를 썰렁하게 했다. 너무나 충격이었다.


  혼자만의 조용한 공간에서 그녀가 하는 일은 개인방송으로 소통하는 일뿐. 하루 중에서 유일하게 말하는 그 순간은 그때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마저 끝나고 나면 다시 철저히 혼자가 되는데, 그날따라 숨통이 조여드는 것처럼 아파서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다. 정말 죽을 것만 같은 고통이다. 겪고 있는 그녀도 보고 있는 나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잠자리가 어수선해서 우연히 유튜브를 보고, 잠이 확 달아났다. 누군가의 밤을 몰래 훔쳐본 것 같아서 마음이 한결 더 스산해졌다. 얼마나 괴로울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여전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눈물짓는 것뿐이었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병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자신의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누군가 위로받을 수 있다면 만족한다는 말을 했다. 이미 그녀는 병을 극복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그녀의 울먹이는 목소리에는 깊은 위로가 있었다. 대체 누가 누굴 위로하는 거지? 민낯을 드러내고, 온몸으로 솔직한 그녀를 바라보면서 나도 나 자신의 아픔을 돌아보게 되었다.




   한없이 아프기만 했던 내 상처를 타인에게 고백했을 때, 그 상처는 위로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다. 내게도 그런 아픔이 있다. 일부러 숨긴 적은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비밀이 되었다. 속마음을 보여주고 친했던 사람들에게 알린 적이 있는데, 하나둘 떠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을 닫게 됐다. 나는 떳떳했는데, 타인이 보기에는 상처였고, 비밀이었던 모양이다. 누군가의 마음에 닿으면 내 상처는 위로의 꽃이 된다. 그런데 또 누군가의 마음에 닿으면 내 상처는 비밀이 된다.

      


 ‘고생 많이 했겠다.’     



  내 이야기를 듣고, 어떤 이가 남긴 말이다. 동정도 아니고, 위로도 아니었다. 그 말은 한동안 마음 깊이 표류하며 떠돌아다녔다. 마음을 더욱 단단하게 못질할 수 있도록 했다. 때때로 말 한마디보다 더 확실하게 느껴지는 게 그 사람이 보여주는 행동의 언어이다. 나를 보는 표정, 눈빛, 걸음걸이, 뉘앙스로 알 수 있다. 그게 위로인지 조롱인지는 여덟 살 먹은 어린아이도 쉽게 알 수 있다. 어쩌면 진한 목소리보다 무반응과 침묵이 더 무서울 때도 있다. 소리 나지 않는 소음, 나는 그게 뭔지 잘 알았다. 누가 알려준 게 아닌데, 그냥 알게 된 것 같다.


  아무리 말주변이 없는 사람이라도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면 그 진심은 통하게 마련이다.  항상 화가 나 있던 눈빛, 말투, 몸짓은 성장 과정에서 트라우마로 남게 된다. 아무리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도 누군가 자신이 미워한다는 것쯤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사람은 애초에 그런 감각에 뛰어나도록 지어졌기 때문이다.




  다시 내 자리로 돌아온다. 방 한구석에서 웅크리고 앉아, 한 아이가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다. 위축된 것처럼 보이고, 자신감도 없어 보인다. 잔뜩 풀이 죽은 얼굴이다. 세상 두려움이란 두려움은 몽땅 뒤집어쓴 얼굴이다. 어두운 낯빛은 살짝 건드리면 당장에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만 같은 기세다.      


  “너 왜 그래, 어디 아파?”

  “나 아파. 근데 아프다고 말할 수가 없어.”

  “왜? 내가 너무 많이 커버렸어.”

  “크면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는 거야?”

  “이젠 내가 보살펴드려야 해. 그러니까… 말할 수 없어.”

  “… 괜찮아. 갑자기 크지 않아도 돼. 마음껏 울어.”     


  '괜찮다'라는 말. 내 마음에 올라온 그 작은 말 한마디, 내면으로부터 올라온 그 소리가 찢어지던 마음을 사그라들게 했다. 상처 받은 어린 날의 나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도 그저 울라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또 한 번 목이 메었다. 그때부터였을까. 아니, 그날 때문이었을까. 동시에 많은 수의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이 너무 싫었지만, 어이없게도 그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빠짐없이 잘 들렸다. 세상의 모든 귀마개는 소음을 걸러내지 못한다. 최소한 나에게는 그랬다. 그러나 소리를 걸러낼 수 있는 것도 온전히 나였다. 어떤 말을 들어도 내가 흔들리지 않으면 되었다. 그렇지만 어린 시절엔 그 소리를 견뎌낼 힘도 없었고, 방법도 몰랐다. 때문에 상처 받았고, 힘겨웠다. 결국 나를 에워싼 수많은 소리가 있었음에 그 소리가 팔 할이 나를 키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감사하게 생각한다. 울 수 있는 눈물이 남아있다는 것이 고맙다. 나 자신으로 인한 상처에 매몰되어 나만 바라보지 않고, 타인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했다는 것이 다행스럽다.

  그 어떤 누구보다도 예민한 성격을 지녔지만, 그래서 더 아팠지만 상처를 공감할 수 있는 마음도 자연스럽게 탑재되었다. 어느덧 눈물과 슬픔, 기쁨과 환희까지 그 모든 목소리를 지나는 것이 사계절이고 인생인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과연 인생에서 버릴 순간이 있을까.




   찬찬히 돌아보면 주기적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소음 덕분에 이만큼 버틸 수 있었다. 내가 살아있다는 소리. 내가 이만큼 숨 쉬고 있다는 소리. 오늘 하루도 살아내고 있다는 너의 소리. 그 소리 덕분이다. 내가 오늘까지 살아낸 것도. 앞으로 내가 살아가게 될 이유도. 그렇지만, 점잖게 조용히 살고 싶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사실은 잘 알고 있다. 때때로 비굴해져야할 때도 있고, 마음에 없는 말도 하고 살아야한다. 그런 나 자신 때문에 돌아눕고 싶은 날도 많을 것이다. 점잖게 살 수 있는 삶이 세상에 과연 있기나 한걸까 말이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나는 조용히 살고 싶다. 여전히. 소리 없는 바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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