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장을 보러 여러 곳을 다닌다. 대형 마트도 가고, 식자재마트도 가고, 로컬 푸드도 가고, 집 근처 개인 상점에도 가고, 시장에도 간다. 한 곳을 정해두지 않고 여러 곳을 다니다 보니 각 장소에 진열되어 있는 그때그때 들어오는 식재료의 종류와 상품 가치와 가격의 차이를 비교하는 재미가 있다.
대형 마트를 주로 이용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가끔 시장에 가보면 좋다. 대형마트의 식재료 공급은 소비자 중심이다. 트렌드가 되는 식재료, 잘 팔리는 식재료, 시든 잎 하나 없고,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하고 반질반질한 식재료들이 화려하게 진열되어 있다. 100g 당 얼마, 하는 식으로 정가제를 운영하지만 대신 가격이 시장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싼 감이 있고, 채소, 나물, 버섯을 비롯해 제철 식재료의 종류가 다양하지 않아서 한 번쯤 이런 말을 하게 된다. “오늘은 또 뭘 먹어야 하나.”
시장의 식재료 공급은 판매자 중심이다. 판매자들은 직접 농사지은 채소, 직접 담근 김치, 된장, 만두 같은 것을 가지고 나와 가판대에 펼쳐 놓는다. 마트에서 보지 못했던 식재료를 발견하면 걸음을 멈추고 ‘이건 어떻게 먹는 거지?’ 하고 자세히 살핀다. 이제는 흔하지 않는 식재료, 요즘에는 잘 찾지 않아 별로 인기가 없는 식재료들이 아직 건재한 것을 보고 있으면 과거에서 오늘로 이어지는 안도감이 나를 미래 세계로 연결한다.
시장에선 채소 같은 것들을 마트에 비해 저렴하게 구입하는 것도 가능하다. 예를 들어 콩나물을 천 원어치만 구입해도 마트에서 구입하는 것보다 서너 배쯤은 많은 양을 구입할 수 있다. 오후쯤 시장에 가면 빨리 팔고 들어가고 싶다고 다 가져가라며 떨이로 막 얹어 주시기도 한다.
시장에 가면 제철 식재료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평소 흔하게 접해보지 못한 나물이나 생선 같은 식재료를 구입하면서 “이건 어떻게 먹는 거예요?”라고 물어보면 우리나라 땅과 바다에서 나는 농수산물을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과거로부터 어떻게 먹어왔는지 알고 계시는 상인들이 선뜻 먹는 법을 알려주신다.
장날이 되면 케이와 나는 시장에 간다. 1일&6일, 2일&7일, 3일&8일 4일&9일, 5일&10일, 5일마다 돌아오는 오일장을 장날이라고 하는데, 서울의 시장들이 대게 상설시장인데 반해 서울을 벗어난 수도권만 해도 오일장이 서는 시장이 많다.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이던 평소의 시장과는 분위기가 다르게 장날이면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열띤 시장이 된다. 어떤 시장엔 엿가위를 들고 엿가락을 파는 상인이 와서 흥겨운 음악을 틀어 놓고, 어떤 시장에서는 살아있는 닭, 토끼 같은 동물을 판다. 큰 대야에는 미꾸라지들이 앞날도 모른 채 유유자적하고, 그 옆에는 먹어도 되나 싶은 개구리들이 갇혀 있다.
민이식위천(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여긴다.) 사랑만 먹고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먹고사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사랑하는 사이일수록 몹시 우선순위가 되는 것 같기도 하다. 혼자라면 계란 프라이를 올린 간장 계란밥 한 그릇이면 충분한 한 끼 식사지만 케이가 앉은 식탁에는 뭐라도 주섬주섬 더 챙기고 싶어 화려한 꽃으로 피어나고 반짝이는 별빛을 내뿜는 가족의 식사로 태어날 화려하지 않아도 좋은 식재료를 구입하기 위해 정성스러운 눈빛으로 꼼꼼하고 바지런하게 시장에서 보물을 찾는다.
타지에서 모여들어 가두판매를 하는 상인들이 펼쳐 놓은 식재료 앞을 왔다 갔다 하며, 평소 보지 못했던 식재료, 제철 식재료, 손글씨로 써 놓은 가격표를 매의 눈빛들이 빠르게 훑는다. 장날 구경을 나온 사람들로 북새통인 시장을 지나다니며 사람 사는 냄새를 맡는다. ‘시장을 실컷 돌아다닐 수 있는 자유로운 처지란 얼마나 근사한지!’
어느 전 집앞에 깔아 놓은 포차 테이블은 일찌감치 사람들이 다 차지하고 앉았다. 전 한 접시에 막걸리 한 사발을 잡수시며 느긋하게 앉아 오후의 장날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케이가 말한다. “우리도 애들 다 크면 이런 데서 간단하게 한 끼 때우고 들어가면 편하고 좋을 거야.” 침을 꼴깍 삼키며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없는 거 빼고 다 있는 오일장이다.
케이랑 나는 무슨 장을 가냐면, 집에서 가까운 오일장을 거의 다 간다. 인근의 시장들은 고맙게도 오일장이 돌아오는 날짜가 순서가 정해져 있는 것처럼 다르다. 주말이 되면 오늘 며칠이지? 장을 가야겠군, 하고 장바구니를 챙겨 시장에 간다. 집에서 한 시간 이상 가야 하는 좀 멀리 떨어진 지역의 오일장도 선뜻 간다.
먹고 사느라 바빠서 데이트할 여유가 없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드라이브한다고 생각하고 장을 보러 간다. 케이가 선곡해 놓은 음악이 흐르는 장 보러 가는 길은 뒷자리에 장바구니를 던져 놓은 것만 빼고는 영락없는 데이트다. 소꿉놀이하는 것처럼 시장 구경을 하다 진짜 데이트하는 사람들처럼 손을 잡고 걷다가 "목마르지?" 시장 안의 커피점에서 음료를 한 잔씩 사서 마시기도 한다.
이 모든 게 가능한 이유는 '귀찮음'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아예 없는 케이 덕분이다. 실제로 나는 이십 년 넘는 동안 케이에게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이 있는데 하나는 '짜증 나'이고 다른 하나는 '귀찮아'이다. 언젠가 이 부분에 대해 신기해하며 물었더니 귀찮은 게 뭐지? 하는 표정을 지어서 아, 이 사람은 귀찮음의 개념이 뭔지 정말 모르는 사람이구나, 알아차렸다. 그래서 나도 가급적 케이와 있는 자리에서 ‘짜증 나,’와 ‘귀찮아’라고 말하지 않으려고 조심한다. 예의상 그래야 할 것 같은, 예의다.
장날 시장에 가면 지속적인 단점이자 최악의 단점이라 할만한 주차 문제를 마주하는데, 전통 시장의 전용 공용주차장이 있고, 대부분 장날은 인도 옆 도로 주차를 허용하긴 하지만 그래도 장날이다 보니 주차난이 상당하다.
‘귀찮음’을 모르고 ‘짜증 난다’는 말을 하지 않는 케이다 보니 공용 주차장에 들어갔다 주차 자리가 없어 돌아 나올 때도, 주차 공간을 찾아 시장 인근을 한 바퀴 돌 때도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조바심 한 번 내지 않고 차분하게 주차 공간 찾는데 집중하는 케이를 볼 때마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지,’ 하며 매번 반한다.
양손에 들 수 있을 만큼의 장을 본다. 식재료가 떨어지면 다시 장을 보러 가고 냉장고에 잔뜩 욱여 놓지 않는다. 소량의 장을 보며 자주 장을 보러 다니니 시간 낭비가 많을 것 같지만 30분 내로 신속하게 식재료를 구입하기 때문에 시간 낭비는 많지 않다. 오히려 많은 양의 식재료를 구입하고 돌아왔을 때 보다 덜 지친다는 이점이 있고 가벼운 운동을 한 기분이 든다. 식재료의 재고를 파악하는 것도 쉽다. 한 번에 다량의 식재료를 구입할 때에 비해 간소하고 소박한 식탁을 차리는 데도 도움이 된다.
“필요한 건 밖에 다 있어!”장날이 오면 장바구니를 들고 케이와 음악을 들으며, 달리는 자동차 창밖의 가로수와 구름과 하늘이 달려와 안기는 것에 환호하며 땅에서 막 뜯은 것 같은, 바다에서 막 건져올린 것 같은, 하늘에서 막 떨어진 것 같은 신선한 식재료를 구하러 장을 보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