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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ly Jun 14. 2023

벌들의 비밀 생활 - 수 몽 키드



벌들의 비밀생활은 2004년 출간되자마자 300만 부 이상이 팔리고 50주 이상 장기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소설이다. 소설의 인기에 힘입어 영화로도 제작이 되었는데 다코타 패닝이 주인공인 릴리 역을 맡았었다. 주인공들은 여성의 슬기로움과 협동 정신, 그리고 연민의 마음이 가지는 힘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아울러 그것이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지도.     


1964년 여름, 릴리에게 벌들이 찾아왔다. 릴리가 열네 살이 되던 해였다. 밤이 되면 그녀는 벌들이 침실 별의 갈라진 틈으로 들어와 프로펠러 소리를 내며 방 안을 빙빙 도는 것을 보았다. 어둠 속에서 크롬처럼 반짝이는 그것들의 날개를 보았고, 갈망하는 무언가를 가슴으로 느꼈다. 꽃을 찾는 게 아니라 그저 기분 좋은 바람을 느끼고 싶어 열심히 날갯짓하는 벌들의 비행은 그녀의 심장을 찢어 놓았다. 낮에는 침실 벽에 터널을 파는 벌들의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꼭 옆방에 틀어놓은 라디오가 전파장애를 받고 있는 듯한 소리였다. 릴리는 그것들이 자신이 맛볼 수 있게 꿀을 뚝뚝 흘리며 침실 벽을 벌집으로 만들어놓는 모습을 상상했다.     


릴리는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실반이라는 마을에서 아버지와 둘이 살고 있었다. 릴리는 아버지를 티레이라고 불렀다. 아버지라고 부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정뱅이인 아버지는 언제나 릴리에게 저주의 말을 퍼붓곤 했다. 밀알이 깔린 창고에 두 시간이나 무릎을 꿇고 앉아 있도록 벌을 주곤 했는데 그러고 나면 온 무릎에 시퍼렇게 멍이 들고 밀알 자국으로 차마 눈 뜨고 볼 수 있는 상처가 생겼다. 릴리와 그녀의 아버지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비극적인 사건이 있었다. 릴리가 4살 때 실수로 엄마를 총으로 쏴 죽게 만든 사건이었다. 그때 엄마는 아버지와 싸우고 가방을 꾸려 집을 나가려 하고 있었다. 적어도 릴리의 단편적인 기억으로는 그랬다. 그때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총을 겨눴고 몸싸움 끝에 총은 바닥에 굴러떨어졌다. 그 총을 릴리가 집어들었고 자기도 모르게 어머니에게 발사하고 말았던 것이다.     


티레이는 복숭아농장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집에는 살림을 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웃에 혼자 사는 로살린이라는 흑인 여자가 가정부 노릇을 해오고 있었다. 릴리는 로살린과 가끔 티격태격하기도 하지만 친구처럼 지내고 있었다. 릴리는 죽은 엄마를 간절히 그리워했다. 매일 밤 엄마의 유품을 꺼내 싫증도 내지 않고 들여다보곤 했다. 유품 중에 가장 이상한 건 흑인 성모 마리아의 그림이었다. 그림 뒷면에는 “티뷰론, S.C”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티뷰론은 실반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마을 이름이었다.      


어느 날 릴리는 로살린과 읍내로 나갔다가 주유소 앞에서 카드게임을 하고 있는 남자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 중 한 명은 악명 높은 인종차별주의자였다. 그들은 로살린에게 ‘깜둥아, 어디 가니’ 라고 경멸적으로 물었다. 로살린은 투표자 등록을 하러 간다고 대답했다. 그 무렵 처음으로 흑인에게 투표권이 주어졌던 것이다. 이들은 계속해서 로살린을 따라오며 로살린을 모욕한다. 참다 못한 로살린이 코담배 침이 가득 담긴 물통을 남자들의 신발 위에 부어버렸다. 남자들은 로살린을 마구 구타했고 경찰은 남자들 대신 로살린을 체포했다. 로살린은 구치소에 갇히고 말았다. 목사가 경찰서를 방문했을 때 경찰관은 로살린이 구타를 당한 게 아니라 넘어져서 머리를 부딪혔을 뿐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티레이는 릴리에게 로살린을 때린 남자가 악명 높은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로살린이 무사히 풀려난다 해도 길에서 마주치면 로살린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소동을 일으켰으니 집에 가서 벌을 주겠다는 티레이에게 릴리는 엄마가 알면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쏘아붙인다. 엄마라는 말에 티레이는 이성을 잃고 화를 내기 시작한다. 네 엄마는 그날 너를 버리고 떠나려던 참이었다고. 널 떠난 건 내가 아니라 네 엄마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릴리의 모든 게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로살린이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아까 그 폭행범들이 경찰서에 찾아왔다. 경찰은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고 그들을 로살린이 있는 독방으로 들여보낸다. 폭행범들은 경찰이 보는 앞에서 그녀를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녀에게 사과하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나 그녀는 끝끝내 사과하지 않았다. 마침내 로살린은 심하게 다쳐 병원으로 옮겨졌고 릴리는 로살린이 입원해있는 병원을 찾아간다. 병실 입구에는 경관이 보초를 서며 감시 중이었다. 릴리는 이런저런 계략을 써서 그를 따돌리고 병실 안으로 들어간다. 로살린이 계속 실반에 있다가는 언젠간 죽고 말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릴리는 로살린을 데리고 탈출하기로 결심한다. 그녀는 주저 없이 엄마의 유품에 적혀 있던 티뷰론으로 가기로 한다. 이렇게 해서 두 여자는 대책 없이 걷고 또 걸어 티뷰론에 도착한다.     


먹을 걸 사기 위해 들른 상점에서 릴리는 흑인 성모 마리아 라벨이 붙은 꿀병을 보게 된다. 이 꿀을 만든 사람이 누구냐고 상점 주인에게 물었더니 양봉을 하며 생계를 꾸리고 있는 흑인 자매들이라고 했다. 릴리와 로살린은 상점 주인이 알려주는 주소로 무작정 그들을 찾아 나선다.     


꿀벌은 사회적 곤충이며 집단생활을 한다. 각 집단은 가족 단일체이고 일벌들은 서로 자매 관계다. 이 일벌들은 서로 협조하여 식량을 모으고 집을 짓고 새끼를 돌본다. 흑인 자매들은 마치 벌들의 공동체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집의 한쪽 구석에는 1미터에 달하는 흑인 여자의 조각상이 놓여 있었다. 조각상은 한쪽 팔을 번쩍 치켜들고 있었고 손은 단단히 주먹을 쥐고 있었다. 그녀의 마멸되고 구부러진 가슴에는 빨간색 심장과 노란색 초승달이 칠해져 있었다.     


자매의 이름은 오거스트, 준, 메이였다. 왜 이름이 다 달력에서 따온 것들이냐고 물었더니 메이는 어머니가 봄과 여름을 좋아하셨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원래는 에이프릴이라는 동생도 있었는데 어렸을 때 죽었다는 말을 하다가 메이는 갑자기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오! 수잔나.” 릴리와 로살린이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메이의 콧노래는 격한 흐느낌으로 바뀌었다. 그녀는 에이프릴이 방금 눈앞에서 죽기라도 한 것처럼 서럽게 울었다.     


릴리는 자매들의 맏언니인 오거스트에게 자신들은 갈 곳이 없다고 털어놓는다. 엄마는 어릴 때 돌아가셨는데 아빠도 지난달에 트랙터 사고로 돌아가셨고 로살린은 릴리네 집 가정부라고 말했다. 고모를 찾아 버지니아로 가고 있으며 돈이 없어서 여기 머무는 동안 일을 돕고 싶다고 거짓말을 했다. 오거스트는 릴리의 거짓말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았지만 잠시 머물러도 좋다고 대답한다.     


로살린은 메이가 정상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둘은 금방 친구가 되었다. “오! 수잔나”의 비밀을 밝혀낸 것도 로살린이었다. 행복한 생각을 할 때의 메이는 지극히 정상이었다. 하지만 좋지 않은 것을 접했을 때 – 예를 들면 꿰맨 상처로 가득한 로살린의 이마나 썩은 토마토를 보았을 때 – 메이는 항상 “오! 수잔나“를 부르기 시작했다. 울음을 터뜨리지 않기 위한 그녀만의 방법이었다. 썩은 토마토를 보았을 때는 그런대로 효과가 있었지만 그 외의 것들엔 전혀 효과가 없었다. 언젠가 머리를 잡아뜯고 비명을 지르며 흐느끼는 메이를 말리기 위해 로살린이 작업실의 오거스트를 부르러 간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오거스트는 침착하게 메이를 숲속의 돌벽으로 보냈다. 그녀를 진정시키는 방법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메이는 집 안에 쥐덫을 놓아두는 것을 반대했다. 덫에 걸려 고통 받는 쥐들이 너무 불쌍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로살린을 미치게 만든 건 거미를 쓰레받기로 잡아 집 밖으로 털어내 버리는 메이의 습관이었다. 릴리는 메이의 그런 점을 좋아했다. 그녀를 보면 바퀴벌레도 그냥 죽이지 않고 크래커를 조금씩 뜯어서 문밖으로 내보내던 엄마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자매의 집 뒤에는 숲과 얕은 강이 있었다. 숲이 시작되는 곳에 시멘트를 바른 돌벽이 있었다. 무릎 높이도 채 되지 않는 그 벽은 무려 45미터 정도의 길이로 늘어서 있었다. 자세히 보니 돌벽의 틈에 꽂힌 종이가 눈에 띄었다. 돌벽엔 접힌 종이가 수백 장이나 꽂혀 있었다. 메이가 괴로운 일이 있을 때마다 그 돌벽에 메모를 써서 꽂아놓은 것이었다.     


둘째 딸인 준은 유독 릴리에게 심술궂게 굴었다. 그녀는 릴리를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준은 임종을 맞는 사람들에게 바이올린을 연주를 들려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다음 생으로 향하는 사람들에게 세레나데를 들려주는 것이었다. 릴리는 준이 항상 죽음 같은 무거운 사건을 접하고 있기 때문에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오거스트는 메이가 왜 지금과 같은 상태가 되었는지를 설명해주었다.    

 

”릴리, 너와 내가 세상의 괴로운 일들을 접했을 땐 잠깐 기분이 언짢을 뿐, 세상이 무너져 내리진 않잖아. 마치 우리 가슴속에 보호막이 둘러져 있어 고통이 우리를 제압하지 못하도록 말이야. 하지만 메이는...... 그애에겐 보호막이 없어. 모든 것이 걸러지지 않은 채로 그애를 파고 들지...... 세상의 모든 괴로움들...... 그애는 모든 게 자신에게 일어난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 구분이 전혀 없는 거지.“     


”메이에겐 쌍둥이 동생이 있었어. 이름은 에이프릴이었지. 두 아이는 마치 한 개의 영혼을 공유하고 있는 것처럼 늘 붙어 다녔단다. 내 생에 그런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어. 에이프릴이 치통으로 고통스러워하면 메이의 잇몸도 에이프릴의 것처럼 빨갛게 부어 올랐지.“     


”에이프릴과 메이가 열한 살이 되었을 때, 각자 5센트씩 쥐고 아이스크림을 사먹으러 가게에 갔던 적이 있었어. 그곳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만화책을 읽고 있는 백인 아이들과 맞닥뜨리게 되었지. 가게 주인이 동생들에게 아이스크림을 팔았지만 반드시 밖에 나가 먹어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어. 고집이 센 에이프릴은 주인에게 자기도 만화책을 보고 싶다고 했다는구나. 그앤 자신만의 방식으로 가게 주인과 언쟁을 벌렸어.“   

  

”에이프릴은 가게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며 서럽게 울면서 집에 돌아왔어. 아버지는 리치몬드의 유일한 흑인 치과의사이셨단다. 아버지야말로 부당한 대우를 숱하게 겪으셨지. 아버지가 에이프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어. ‘세상에 공평한 것은 없단다. 지금부터 그걸 명심하고 살아야 해.’“     


”대부분 아이들은 그런 상황을 그냥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넘겨버릴 테지만 에이프릴은 달랐어.“ 오거스트가 말했다. ”그애의 삶의 희망이 꺾여버린 것이었지. 그렇게 세상을 보는 눈을 뜨게 된 거야. 그 어린 나이에 말이야. 그때부터 학교에 가기 싫거나 하기 싫은 일이 있을 때마다 그앤 고집을 피우기 시작했어. 그리고 열세 살이 되었을 땐 심각한 우울증을 앓게 되었지. 물론 메이도 에이프릴이 앓는 증상을 고스란히 앓았어. 열다섯 살이 되던 해, 에이프릴은 아버지의 산탄총을 꺼내들고 자살을 했단다.“   

  

”에이프릴이 죽자 메이 안의 무언가도 같이 따라 죽게 된 거야. 그 후론 한번도 정상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어. 마치 온 세상이 메이의 쌍둥이 동생처럼 되어버린 셈이지.“     


“우리 어머니는 그애가 성모 마리아 같다고 하셨어. 심장이 가슴 밖으로 나와 있다고 말이야. 어머니는 메이를 정성껏 돌보셨지. 하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론 메이는 나와 준의 책임이 되어버렸어. 우린 오랫동안 메이를 위해 온힘을 쏟았단다. 의사에게도 데리고 가보았지만 전부 메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더구나. 그저 집에 감금해두라는 말 밖엔 없었어. 그래서 준과 난 메이가 맘껏 흐느낄 수 있도록 통곡의 벽을 쌓을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된 거야.”

”무슨 벽이라고요?“

“통곡의 벽. 예루살렘에도 있잖니. 유대인들은 그곳에 가서 통곡한단다. 각자 품고 지내던 괴로움을 풀어버리자는 거지. 그들은 종이에 자신의 기도를 적어 벽에 꽂아두곤 해.”     


메이는 성모상의 붉은 심장이 몸 바깥에 드러나 있는 것처럼 아무런 보호막 없이 세상의 고통을 받아들여야 하는 여린 사람이다. 타인의 고통을 자기 일처럼 아파하는 그 마음은 성모 마리아가 고통 받는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것과 비슷한 마음이다. 메이는 감정이입이 지나치게 잘 되어서 도저히 일상 생활을 해나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일요일이 되자 ‘마리아의 딸’이라는 모임의 회원들이 예배를 보기 위해 자매들의 집을 방문한다. 처음 도착한 사람은 퀴니라는 이름을 가진 할머니와 그녀의 딸 바이올렛이었다. 그밖에도 모자 기술자인 루넬도 있었고, 마벨리라는 자매와, 오티스라는 남자 멤버, 그의 아내 슈가 소녀도 있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루넬이 만들어준 엄청나게 화려한 모자를 쓰고 있었다. 릴리와 로살린은 얼떨결에 그들의 예배에 참석하게 된다.     


“이야기는 자꾸 들려주지 않으면 죽게 되어 있어요. 이야기가 죽게 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이곳에 왜 모였는지를 잊게 되지요.”     


그러면서 오거스트는 집에 놓여 있는 성모상에 대한 전설을 들려주었다. 옛날, 흑인들이 노예가 되어 학대 받고 살았을 때 그들은 매일 낮과 밤을 구원을 위한 기도로 보냈다. 제발 자신들을 살려달라고 간절히 청했다. 위안과 자유를 달라고.     


어느 날 오바디아라는 이름의 흑인 여성이 강가의 보트를 끌어올리러 나갔다가 강기슭에 뭔가가 밀려올라와 있는 걸 보았다. 그것은 나무로 깎은 여자의 조각상이었다. 흑인 여성처럼 생긴 조각상은 불끈 쥔 주먹을 위로 번쩍 들고 있었고, 그녀의 몸에서는 찬란한 빛이 뿜어져나오고 있었다.     


오비디아는 그것을 끌어안고 교회로 데려갔다. 그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펄이라는 이름을 가진 노예 여성은 이 분이 바로 예수의 어머니인 것 같다고, 온갖 고통의 순간들을 목격했으며 무척 강하고 절개가 굳은 여인인 어머니의 심장을 가진 바로 그 분인 것 같다고 말했다.     


흑인들은 그녀가 자신들이 겪었던 모든 고통을 전부 알고 있을 거라 믿었다. 그래서 차례로 돌아가며 그녀의 심장에 다섯 손가락을 가져다 댄 후 하나씩 입을 맞추었다. 천천히, 매우 감격적인 동작으로.     


그러자 그녀에 대한 소문이 노예 소유주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어느 날 그는 흑인 성모를 쇠사슬에 묶은 뒤 창고에 가둬버렸다. 성모는 인간의 도움을 받지 않고 탈출하여 교회로 돌아왔다. 그런 일이 50번이나 반복되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녀를 쇠사슬의 성모마리아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녀가 쇠사슬에 묶여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쇠사슬을 끊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이야기가 끝난 뒤 준이 첼로를 다리 사이에 끼고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멤버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어깨를 들썩였다. 마치 바다 속의 화려한 해초를 보는 듯했다. 이어서 준이 피아노 앞에 앉아 요란한 풍으로 “가서 산에게 말해봐”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오거스트는 콩가를 추고 있었다. 모든 마리아의 딸 회원들이 서로의 허리를 붙잡고 신나게 춤을 추었고 춤이 끝나고 나서는 나무 조각상의 심장에 손가락을 가져다 댄 후 하나씩 입을 맞췄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릴리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이것이 마리아의 딸 모임의 예배 방식이었다.     


그렇게 몇 개월이 흘렀다. 그 기간 동안 릴리는 오거스트가 얼마나 현명하고 자애로우며 강인한 사람인지 알게 되었다. 그들은 이 흑인 자매들을 통해 지친 몸과 마음을 치유하고 그들에게 동화되어 간다. 준도 결국에는 마음을 열고 릴리와 친구가 된다. 준에게는 그녀를 사랑하는 닐이라는 남자가 있었는데 준은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예전에 결혼하기로 했던 남자가 결혼식장에 나타나지 않자 크게 상처를 받고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것이었다.     


자매들의 양봉장에는 벌을 치고 꿀을 배달하는 잭이라는 흑인 소년이 있었다. 잭은 뛰어난 우등생이었는데 대학에 가기 위해 돈을 모으고 있는 중이었다. 잭의 말에 따르면 잭 팔렌스라는 유명한 영화배우가 티뷰론의 극장을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다. 잭 팔렌스의 여동생이 티뷰론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잭 팔렌스는 극장에 흑인 여자를 데리고 가서 아래층 백인 전용 좌석에 앉을 예정이라고 했다. 이 일로 마을은 온통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개럿의 철물점에서는 백인들이 극장 정문을 지킬 예정이라고도 했다. 그날이 되자 잭은 읍내에 볼 일이 생겼고 릴리도 잭을 따라가게 되었다. 극장 매표소 앞에 대여섯 명의 백인 남자가 서성이고 있었다. 그들은 잭 팔렌스와 흑인 여자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때 그 남자들이 한 무리의 흑인 소년들을 향해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그 흑인 소년들은 잭의 친구들이었다. 그러다 순식간에 싸움이 벌어졌고 경찰은 잭과 그의 친구들을 연행해갔다.      


오거스트의 집에도 잭이 감옥에 가 있다는 소식을 알리는 전화가 걸려왔다. 그런데 하필 메이가 그 전화를 받고 말았다. 모든 사람들이 메이가 발작을 일으킬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전에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기묘한 상태에 빠진 것 같았다. 호흡이 거칠어지더니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가 스르륵 미끄러졌다. 발작도 일으키지 않고 초점 잃은 시선으로 앞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드레스 스커트 자락을 쥐고 흐느끼지도 않았고 몸을 앞뒤로 흔들지도 않았다. 땋은 머리를 잡아당기지도 않았고 평소와는 달리 무척 조용했다. 그녀는 조용히 벽에 다녀와야겠다고 말했다.      


그날 밤 메이는 얕은 강물 바닥에서 가슴에 돌을 얹어놓은 채로 발견되었다. 오크나무 뿌리 밑에서 유서가 발견되었다. 유서에는 더 이상 이 무게를 짊어질 수가 없으며 편히 누워 있고 싶다고 적혀 있었다. 자신은 떠나야 할 시간이고 언니들은 살아야 할 시간이라고. 메이의 장례를 치르면서 오거스트는 준에게 삶을 살아야 할 시간이라고 말한다. 준은 닐의 청혼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메이의 장례식이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릴리는 오거스트에게 자신이 누구이고 왜 여기로 오게 되었는지를 털어놓는다. 엄마와 그녀의 유품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을 때, 오거스트가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릴리 엄마가 가출해서 도망쳐온 곳도 바로 오거스트의 집이었던 것이다. 오거스트는 릴리 엄마의 유모였다. 결혼 생활에 실망한 릴리의 엄마는 가출한 뒤 3개월 간 오거스트의 집에 머물렀었다. 크래커를 뿌려서 바퀴벌레를 내보내는 법을 릴리 엄마에게 가르쳐준 사람은 메이였다. 릴리는 오거스트에게 엄마가 이 집에 머물렀을 때 아기였던 자기도 데려왔었냐고 묻는다. 오거스트는 릴리의 엄마가 혼자 왔었다고 대답했다. 총기 사고가 일어났던 날, 릴리의 엄마는 집으로 돌아와 티레이를 영원히 떠나기 위해 짐을 꾸리고 있던 중이었다. 오거스트는 릴리의 엄마가 그날 릴리를 이 집으로 데려오려 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릴리는 엄마가 자기를 버려두고 가출한 적이 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는다.      


그 뒤 릴리는 모든 일에 의욕을 잃고 방황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불행하고 힘든 삶을 위로하기 위해, 릴리는 언제나 엄마에 대해 이것저것 상상하고 엄마만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유일한 사람이라고 상상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엄마가 자기를 티레이에게 남겨둔 채 가출을 했었다니. 어느 날 오거스트는 릴리 엄마가 남겨놓고 간 물건들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한다.     


”성모 마리아는 요정처럼 어디엔가 계시는 신비한 분이 아니시란다. 응접실에 그냥 멀뚱하니 놓여 있는 조각상도 아니시고 말이야. 성모님은 네 안에 계시단다. 내가 하는 말, 이해하겠니?“

”성모님이 내 안에......“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말을 반복했다.     

그녀가 내 앞으로 손을 흔들었다. ”손을 줘봐.“

나는 왼손을 들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가 내 손을 쥐고 내 가슴에 가져가 댔다. 심장이 뛰고 있는 바로 그곳으로. ”힘과 위안과 구원을 얻기 위해 꼭 마리아의 심장에만 손을 얹을 필요는 없단다. 여기에 손을 얹어도 충분히 얻을 수 있으니까. 바로 네 심장에 말이야.“     


“내가 얘기한 성모님은 항상 네 가슴속에 앉아 이렇게 말씀하고 계셔. ‘릴리, 넌 나의 영원한 집이야. 절대 두려워하지 마. 나만으로 충분해. 우리만으로 충분하다.’”     


나만으로 충분하다는 오거스트의 말은 마음의 의지처가 없더라도 스스로의 힘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충분히 강인해질 수 있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란 성모 마리아의 심장이 살고 있는 집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기 안에 힘을 가지고 있다고 오거스트는 말하고 있었다.     


마침내 티레이가 릴리의 행방을 추적하여 오거스트의 집으로 찾아온다. 마침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나 있는 티레이에게 릴리는 예의 바르게 말없이 나가버려서 미안하다고 말한다. 티레이는 릴리의 그런 태도에 다소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가 무엇보다 충격을 받은 것은 릴리가 꽂고 있는 돌고래 핀 때문이었다. 그 돌고래 핀은 티레이가 릴리의 엄마에게 선물로 사준 것이었다. 티레이는 돌고래 핀이 어디서 났냐고 묻는다. 릴리는 오거스트가 누구인지, 엄마와 어떤 사이인지 자초지종을 설명해주었다. 티레이는 릴리를 집으로 끌고 가려 한다. 그러나 오거스트와 마리아의 딸 회원들과 로살린이 나타나 그를 가로막았다. 오거스트는 릴리가 양봉법을 배우고 있으며 우리 모두가 릴리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말했다. 티레이는 귀찮은 짐을 덜게 생겼다며 혼자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릴리는 그의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거스트 자매를 주축으로 한 마리아의 딸 공동체는 상처투성이로 만신창이가 된 주인공(릴리)에게 따뜻한 치유의 보금자리를 마련해준다. 이 공동체는 정이 넘쳐흐르고 섬세한 배려가 빛을 발하는 그런 곳이다. 또, 자애롭지만 동시에 지혜롭고 정의로운 그런 곳이다. 이곳에서는 구성원들의 생활과 삶 그 자체가 예술이 된다. 영혼으로 공명하며 자매애로 서로를 치유하고 각자의 운명을 따라 더욱 성숙할 수 있게 힘을 준다. 슬픔을 견디고 승화시킬 수 있도록 함께 돕는다. 세상의 한 켠에서 작지만 치유를 행하는 사람들이 모여 조용하고 평화로운 변화를 일으킬 수만 있다면. 그러나 릴리처럼 모든 걸 다 잃고 정처 없이 길을 떠났을 때 저런 사람들을 만나게 될 확률은 ‘아예 없다’.      


오거스트처럼 완벽한 사람이 있을까. 그토록 현명하고 자애로우면서도 강인한 여성이. 오거스트야말로 지성과 따뜻한 심장을 두루 갖춘 성모 마리아 같은 인물이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는 이상세계 속에서나 등장하는 천사일 뿐이다. 이 책에는 몇몇 인종차별주의자들을 빼면 악한 사람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어린이들이 읽는 동화책보다 더 이상주의적인 책이지만 몇 가지 비유가 무척 아름다웠다. 성모 마리아의 붉은 심장이 아무런 보호막도 없이 바깥에 드러나 있어 작은 자극에도 견디지를 못하고 무너져내리는 것. 즉, 여리디 여린 마음을 가진 메이에 대한 비유다. 그것은 어쩌면 온 세상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어머니의 측은지심을 가진 심장일 것이다. 또한 모든 억압과 굴종의 사슬을 끊고 고통 받는 사람들의 곁으로 돌아온 흑인 성모 마리아에 대한 우화는 그와 같은 강인함이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음을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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