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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몬스테라 Jul 30. 2024

법무부의 딸

지금은 휴정기이다. 법원은 혹한기나 혹서기에 2주간 쉰다. 긴급한 사건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재판부에서 재판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도 모처럼 여유로운 날을 보내고 있다.


집안을 청소하고 정리되지 않은 가방들 속에서 물건을 빼서 정리하던 중 2주 정도 전 피고인으로부터 받은 그림이 나왔다. 피고인으로부터 받은 편지는 보통 사무실에 보관하는데, 이 피고인의 편지는 집으로 들고 왔다. 간직하고 싶어서.


그녀는 물건을 전달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보이스피싱에 연루된 20대 여성이었다. 몸이 거구였고 대화를 해보니 지적장애가 있거나 무언가 부족해 보였다. 그녀는 자신이 한 아르바이트가 보이스피싱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절망했지만 모든 잘못을 인정하고 있었다.


보이스피싱은 사회적으로 큰 문제이고 몸통 조직이든 휘말린 아르바이트생이든 엄벌에 처해진다. 그녀는 아버지로부터 성폭력을 당하고 도망치듯 집을 나와서 온갖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홀로 살았다. 공장도 다니고 빵집에도 다니고 더운 날에도 추운 날에도 걸어서 배달도 하다가 물건 전달 아르바이트까지 하게 되었다. 억척같이 성실하게 일한 끝에 더 많은 사건에 연루되게 되었다. 그녀는 긴 징역을 살아야 할 테다.



접견실에서 그녀의 발을 보니 맨발에 고무신을 신고 있었다. 구치소 내에서는 영치금으로 물건을 살 수 있는데 운동화도 살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수용자들이 운동화를 신고 있는데, 피고인은 법무부 관급 물품인 고무신을 신고 있었다.


그녀는 친부의 성폭력으로 아버지와의 관계가 단절되었고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으며, 학업을 그만두고 오랫동안 홀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내느라 그녀의 징역살이에 영치금을 보태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밖에서 가족들이 돕는 피고인들의 경우 변호인이 가족들로부터 탄원서나 양형자료도 받지만, 이 여성 피고인처럼 가족과 단절되고 도와줄 사람이 없는 경우에는 구치소 내 생활의 어려움이나 건강, 빈곤 정도를 양형사유로 써서 제출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피고인에게 물었다.

"영치금 얼마 있어요?"
"이천.."

내 뇌가 쉬고 있었는지 나는 "네? 이천만 원요?"라고 물었다.


피고인이 고개를 흔들며 수줍게 말했다.

 "아니요. 이천 원요.. 우표랑 종이 살 돈이 없어서 재판부에 내는 반성문 쓸 종이도 방 사람들한테 신세져요." 라고 했다.


구치소에서는 같은 방 사람들끼리 돈을 내어 물건이나 음식을 공동구매하고 이것을 나누어 먹는다. 그래서 구치소 내에서도 돈이 없는 사람들은 돈이 있는 사람들 대신 설거지나 빨래, 심지어 안마까지 해주면서 서글픈 징역살이를 하는 경우가 많다.


 돈이 없는 사람의 징역은 돈이 있는 사람의 징역과는 다르다. 같은 형벌이 아니다.


피고인에게 방 사람들이 힘들게 하지는 않는지, 구매물품은 어떻게 하는지 물었다. 그녀의 방 수용자들이 그녀를 노예처럼 부려먹거나 괴롭힐까 봐 걱정도 되었다. 그런데 그녀가 뜻밖의 대답을 했다.


"다들 정말 잘해주세요."


그 이유는 그녀의 그림실력에 있었다. 그녀는 과거 웹툰작가를 꿈꾼 적이 있었을 정도로 그림 그리기에 재능이 있었다. 혼자 있는 시간들이 그녀의 그림실력을 키워주었다.


그녀는 가족이나 지인과 서신을 주고 받는 방 사람들의 부탁으로 편지 봉투에 그림을 그려주고 종이나 펜을 빌리거나 간식을 얻어먹으면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렇게 얻은 종이로 재판부에 반성문도 내고 변호인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었다.


신이 다 가져가는 것은 아니구나 싶었다. 긴 징역살이 동안 그녀의 그림 실력이 그녀의 안전을 지켜줄 수 있을 것이다.


접견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에 머릿속에 내내 이천 원이 떠나지 않았다. 구치소 민원실 건물을 지나 사무실로 향하는데 자꾸만 민원실 건물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녀에게 조금의 영치금을 넣어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영치금을 주려면 민원실로 가서 지인등록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에혀, 뭐 하러.. 이런 마음으로 다시 사무실로 향하다가

아버지의 성폭력으로 돌아갈 곳이 없어서 출소하면 또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는 그녀의 풀 죽은 모습과 이천 원이 자꾸만 생각나서 다시 민원실로 향했다가.. 훽훽 돌면서 방향을 계속 바꾸다 보니 내가 마치 옛날 개그맨 배삼룡과 구봉서가 추던 그 춤을 길에서 추고 있는 것 같았다.


결국 나는 민원실을 그냥 지나가지 못하겠다는 마음이 들어서 민원실로 들어갔다. 지인등록을 하고 그녀에게 영치금을 넣어주었다.


며칠 뒤 편지가 왔다. 내가 접견 중 그녀의 성폭력 피해 얘기를 듣고 "가족이라고 꼭 다시 볼 필요는 없어요."라고 한 것이 너무 고마웠고, 자식으로서 아버지를 보지 않고 있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내려놓았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영치금을 넣었다는 것을 알고 엉엉 울어서 교도관이 왜 그렇게 우느냐고 묻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그녀의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우리 사무실의 다른 변호사님 한분과 나를 위해 그림을 그려서 보냈다. 나는 주로 B급 감성의 그림을 그리고 좋아한다. 그래서 내 취향은 아니지만 자신의 변호인들을 생각하면서 조심스럽게 그림을 그렸을 그녀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며칠 전 참 무더운 날이었다. 출근길에 어찌나 날씨가 푹푹 찌는지 걷는 게 힘들었다.


사무실로 향하는 길가에 어떤 노인이 직접 쓴 듯한 '행운의 네 잎 클로버 사세요.'라는 작은 글귀가 있었고 노인은 땡볕에 앉아있었다. 지나가는 사람이 많은 곳이라 그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자리 잡은 것 같았다.


아무도 그 노인에게 관심이 없이 출근길을 재촉하는 발걸음이었다. 노인이 직접 뜯은 듯한 네 잎 클로버들이 시든 상추처럼 펼쳐져 있는 것을 보고 나도 빨리 지나쳤다. 네 잎 클로버가 행운을 가져다준다면 네 잎 클로버를 저렇게 많이 발견한 노인은 왜 어떤 행운도 오지 않은 것처럼 보이나.


그러다 멈칫했다.


행운을 팔고 있는 행운 없어 보이는 노인도
저 네 잎 클로버가 팔리면 행운이겠지?


나는 다시 길에서 사무실과 노인 사이를 오가는 배삼룡 춤을 추다가 노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가 당장 집에 들어갈 수 있는 행운을 선물했다.

장기적인 도움이 아니라 일시적인 도움이나 행운도 그 사람이 한고비를 넘겨서 살게 할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나의 피고인에게 영치금을 준 것은 그녀가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그녀의 인생에는 늘 나쁜 일과 불운만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작은 기억을 선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법무부 관급 물품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나의 피고인은 법무부의 딸이고,

나는 자발적 호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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