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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몬스테라 Jun 18. 2021

변론과 간병을 동시에 한 썰

이 사건은 2019년에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한 소위 ‘뺑소니 사건’이었다.


법인택시 운전기사인 중년 여성이 피고인이었다.   

  

피고인이 유턴 허용구역 조금 앞에서 유턴을 했는데

옆을 지나던 배달 오토바이가 직진하다가 저 앞에서 가로수를 박고 쓰러졌다.

피고인은 유턴할 때 오토바이를 보지 못했고 피고인과 오토바이가 직접 충돌한 것이 아니었다.    


비접촉 사고였고, 차량 블랙박스 영상을 보니 피고인이 사고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것 같은 정황이 여럿 있어서 다투어 볼만 했다. 원래 벌금 500만 원으로 약식 기소되었는데 피고인이 불복해서 정식재판을 청구했던 사건이었다. 피고인은 벌금 수배되어 노역장에 유치될까 봐 지인에게 돈을 빌려 벌금을 납부했지만 이 돈을 갚아야 하니 앞이 캄캄하다고 했다.     


피고인은 남편의 가혹한 폭행을 견디며 아들을 키우고 있었는데,

초등학생인 아들이 피고인에게 제발 이혼해 달라고 해서 아들만 데리고 집을 나와

억척같이 일하며 살았다고 했다.


그 피고인에게는 뇌종양과 심장병도 있었지만,

악화되지 않는 지병에 감사하며 열심히 운동하고 일하면서 살고 있었다.

피고인은 운전을 해본 적이 있는 일반 시민들이 블랙박스 영상을 본다면 자기가 사고를 인식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국민참여재판 한 달을 앞두고 피고인과 연락이 되지 않았다.

예전에 피고인으로부터 모 종합병원에서 심장을 치료받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서

그 병원 흉부외과에 전화를 했다. 이00라는 환자가 입원해 있는지 알려 달라고.

간호사는 개인정보 때문에 환자가 입원해 있는지 알려 줄 수 없다고 했다.


나는 간호사에게 이 분이 입원해 있다면 환자나 그 보호자에게 000 변호사가 애타게 찾고 있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그날 피고인의 아들로부터 전화가 왔다.

피고인의 아들은 어머니가 갑자기 심장 이상으로 쓰러졌고, 의식 없이 중환자실에 14일간 있었다고 했다.

  

피고인은 갈비뼈를 열고 심장수술을 한 후 계속 입원 중이었다.

피고인에게 염증이 있는지 재판 날짜가 다가오는데도 매일 심한 열이 나서

의사가 열이 계속 나는 한 재판이 있는 날 외출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피고인은 소아마비로 다리 길이가 달라서 식당일이나 파출부 일 등 다른 일은 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앉아서 하는 운전은 가능한데, 뺑소니가 되면 면허가 취소되므로 택시기사를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되면 생계가 막막해지는 상황이었다.


피고인은 재판에 출석하지 못하거나 무죄를 받지 못하면

자기는 퇴원해도 그냥 죽어 버릴 거 같다고 했다.

20대 앞길이 창창한 아들이 공사판에서 일하는데 그 아들에게 짐이 돼서 살 수는 없다고 했다.     


피고인은 무슨 일이 있어도 출석할 테니 대신 자신이 일어설 때나 앉을 때 앞에서 안아달라고 했다.

가슴을 열고 수술했기 때문에 상체에 힘을 주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국민참여재판 당일에 피고인이 아들의 부축을 받아 나왔다.     

이 날 무슨 정신으로 변론했는지 모르겠다. 이뇨작용이 있는 약 때문에 수시로 화장실에 가야 하는 피고인(나와 같은 여성임)을 앞에서 안아 들고 일으켜 세우고 화장실까지 부축해서 간 다음 피고인이 바지를 내리면 다시 피고인을 안고 변기에 앉혀야 했고, 용변을 다 보면 내가 안고 일으켜 세워야 했다. 손에 힘을 주지 못하고 주저앉기를 반복하며 힘들어할 때에는 옷을 내리고 올리는 것도 내가 해 주어야 했다.    

 

가사와 일을 병행해 보았지만 변론과 간병을 병행해 보기는 처음이었다.   

 

이 날 유능하고 잘생긴 검사님의 현란한 언변은 우리의 초강력 울트라 파워 초라함에 지고 말았다.

피고인의 인생도 구구절절했지만 법정에서 오늘내일하는 것 같은 사람을 일으켜 세워서 부축해 나가는 변호인. 발을 맞추어 천천히 걸어 나가는 두 여성의 느린 걸음.. 병색이 완연하고 깡마른 피고인의 존재 자체가 양형자료였다.     


“여러분. 사고 시간을 보십시오. 밤 12시에 택시 운전하고 있었습니다.” 배심원들 눈에서 안쓰러움이 뚝뚝 떨어진다. 화면에 피고인의 진단서를 띄웠다. “피고인에게는 뇌종양이 있고, 피고인의 심장에는 3개의 인공판막이 있습니다. 지금 피고인은 계단도 오르지 못하는 절망적인 건강상태입니다. 그렇지만 택시 면허가 취소되지 않는다면 피고인이 밥 잘 먹고 운동 열심히 해서 건강해지면 언젠가는 다시 택시운전을 할 수도 있다는 희망만은 가지고 살 수 있겠지요.” 모두 숙연해졌다.     


그날 뺑소니 혐의에 대해서는 블랙박스 등에 피고인이 사고를 인식하지 못하였다는 정황이 드러나 무죄판결을 받았고, 피고인이 자신으로 인하여 피해자가 상해를 입게 된 것은 다투지 않았기 때문에 업무상 과실치상은 벌금 500만 원으로 하되 벌금형의 집행유예가 선고되었다.     


피고인이 면허가 취소되지 않으면서도 벌금을 돌려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심부전이 올 수 있다는 의사의 만류를 뒤로 하고 종일 법정에 앉아 재판받을 수 있었던 힘은, 아들에게 부담을 줄 수 없다는 악착같은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피고인을 부축해서 법정 밖으로 나오니 피고인의 아들이 불안한 눈빛으로 우리를 살피며 엉거주춤 일어났다.     

피고인이 아들을 안고 소리 없이 울자 아들이 엄마의 등을 위아래로 쓸어내렸다.

고생하면서 살아도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며 아끼는 모자의 모습을 보니

부족할 것이 없어 보였다.    


소유물의 부족은 개선할 수 있으나

영혼의 가난은 해결하기 쉬운 것이 아니다.

-몽테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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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일담)


며칠 전 사무실 동료 변호사님이 교도소에 접견을 가기 위해 법원 앞에서 택시를 탔는데, 기사님이 여자였다고 한다. 기사님 동료 변호사님이 변호사라는 것을 알고는 내 이름을 말하면서 혹시 그 변호사를 아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자신은 변호사를 태울 때마다 내 얘기를 한다면서.     


내 동료 변호사님이 나와 절친하다고 답하니 그 기사님이

나를 "내가 인생에서 가장 어려울 때 만난 사람이고 다시 밥벌이를 찾아준 사람"이라고 하셨다고 한다.


그녀가 건강을 회복하고 다시 운전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어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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