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
얼마 전 김영하 작가가 예능 프로그램인 유퀴즈에 출연한 적이 있습니다. 많은 이야기들이 오갔지만, 저는 그 중에서도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에 대한 말이 가장 인상깊었습니다.
우리가 살 때, 힘들 때가 있거든요. 그 때 나와 비슷할 수 있었던 누군가의 다른 삶을 굉장히 상세하게 아는 것만으로도...내가 그 때 그 사람과 결혼을 안 했으면 난 어떻게 됐을까, 또는 내가 그 때 개그맨을 안 하고 이게 됐으면 어떻게 됐을까. 그랬을 때 그걸 아주 세밀하게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지금 살고 있는 삶이 굉장히 좀, 특별해 보여요. 그리고 이게 어떤 많은 삶 중에 하나고, 내가 어쨌든 나밖에는 이 이야기를 만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하면 이상하게 견딜 만해요.
그럴듯한 이야기였습니다. 동시에 내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는지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비단 소설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왜 시를 읽고, 소설을 읽고, 또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걸까요. 당장 내 삶에 도움이 되는 자기계발서도 아니고, 어떻게 보면 그냥 누군가가 지어낸 이야기일 뿐일지도 모르는데 말이죠.
대한민국 문학진흥법에 따르면, 우리는 문학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문학이란 사상이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한 예술작품으로서 시, 소설, 희곡, 수필, 평론 등을 말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바라보아야 할 것은 '사상이나 감정'이라는 단어일 것 같습니다. 아, 사상이라는 말은 조금 어렵네요. 조금 더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생각'이라고 표현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문학으로부터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언어로 읽습니다. 그리고 이 생각과 감정의 공통점 중 하나는, 한 마디로 정의하기가 어려운 개념이라는 겁니다.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단순히 어떤 존재를 좋아하는 감정인가요? 그렇다면 '좋아함'과 '사랑'의 차이는 어떤 건가요? 국어사전에서는 사랑을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또는 그런 일'이라고 정의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간단하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모두 설명할 수 있나요? 사랑 때문에 어떤 한 사람이 완전히 파괴되어 버리는 경우에, 우리는 이것마저도 사랑의 형태 중 하나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사람에게 사랑과 무관심은 어떤 차이가 있는 건가요?
제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설명할 수 없다'입니다. 사랑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느끼는 수많은 감정들과 생각들은 너무나 복잡하고 다양한 개념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가끔은 그 복잡한 개념을 하나의 단어로 표현했다는 사실이 신기하다고 느껴질 정도로요. 우리는 이 단어들을 받아들일 수는 있지만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게 바로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할 것입니다.
최근에 읽었던 소설 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작품은 정영수 작가의 '내일의 연인들'이라는 단편집이었습니다. 헤어진, 혹은 곧 헤어질 연인들의 이야기들이 담겨 있는 책이었는데, 제가 겪었던 경험들과 소설의 내용이 묘하게 겹쳐졌기 때문입니다. 인물들의 감정의 흐름을 따라갈 때마다 제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들킨 것만 같아 마치 벌거벗겨진 채 거울 앞에 세워진 기분이었습니다. 무어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공감과 수치심과 깨달음 그 사이의 어딘가에 있는 감정이랄까요.
문학평론가 신형철 님은 이 작품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신이 미성숙하다고 느끼며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화자가 자신보다 더 성숙하다고 느껴지는 누군가를 만나 그에게서 무언가를 배우는 이야기'라구요. 재미있는 건, 소설 속에서 화자가 만나는 그 '누군가'는 화자에게 어떤 것도 가르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화자는 소설 속에서 어쩌면 '스승'이라고 말할 수 있을 법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스스로 질문을 찾고 깨달음을 얻습니다. 어떨 때는 그 스승과 대화를 하면서, 또 어떨 때는 스승의 실패가 가르침이 되기도 합니다. 스승은 '그저 살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신형철 님은 뒤이어 소설의 존재에 대해서도 비슷한 설명을 합니다.
가르칠 수 없음을 가르치고 배울 수 없음을 배운다는 것. 이것은 말장난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좋은 이야기가 우리를 교육하는 방식이다. 삶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앎(지식)은 쉽게 말로 전달되지 않는 비명제적 지식에 속한다. 비명제적 지식을 배우는 일은 그냥 그런 것이 있다는 것만을 겨우 배우는 데서 멈추는 일이다. 그런 빛나는 멈춤의 순간을 창조하는 것이 작가의 일 아닌가.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말입니다. 소설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습니다. 온갖 상징과 의미가 꽉꽉 눌러담아진 하나의 거대한 은유도 아닙니다. 소설은 우리에게 그저 이야기를, 그것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줄 뿐입니다. 우리는 그 이야기 속에서 나의 모습을 발견하고, 내가 보고 싶었던 모습을 발견합니다. 어떨 때는 스스로가 하지 못했던(혹은 하지 않았던) 모습을 발견할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소설 속의 인물들에게서 어떤 종류의 '성숙함'을 스스로 찾아내고, 그것을 나의 스승의 모습으로 만들어냅니다. 우리가 발견한 스승을 보고 어떤 걸 배우고 깨달았는지는 스스로도 명확하게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냥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느낌만 받을 때도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이야기가 스스로 말하는 진리와 정답은 없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겁니다. 소설가는 우리를 설득하려는 웅변가나 연설가가 아니라 이야기꾼이니까요.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소설을 읽으면 어른들이 항상 물어보던 질문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책의 주제가 뭔데?", 혹은 "그 책의 교훈이 뭔데?"가 그것입니다. 우리는 줄거리를 요약하고, 의미를 해석하고, 또 주제를 정리하는 데 익숙합니다. 그런데 정작 글을 쓰는 소설가분들의 말은 다릅니다. 우리는 교훈을 작품 속에 숨겨두고 독자들과 보물찾기를 하지 않는다, 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나는 순간 작가의 것이 아니다, 하는 말을 하곤 하죠. 어쩌면 우리가 지겹도록 줄거리를 요약하고 주제를 찾으면서 어느 순간 어렵다는 느낌이 들었던 건 우리의 부족함 때문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똑같은 소설을 읽으면서도 읽는 사람마다 본인이 공감하는 지점이 다르고, 본인이 발견한 '스승'이 다를 테니.
그렇게 생각하면 소설을 읽는 건 그 안에 숨겨진 주제와 교훈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친구와 대화를 하는 것과 더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나는 네 이야기에서 이 부분이 참 공감이 가. 나는 이랬던 적이 있는데, 너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 것 같아? 하는 식의 대화를 나누면서 조금씩 내 생각의 지평이 넓어지는 거죠. 어떨 때는 내가 느꼈던 감정을 이런 언어로 표현할 수도 있겠구나, 그 때 내가 했던 그 생각이 바로 이거였구나 하는 식으로 혼자 깨달음을 얻기도 하구요. 물론 어떤 명확한 주제를 말하기 위해 쓰여진 소설도 있지만, 그 소설에서마저도 우리가 반드시 그 주제만을 느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요즘 사람들 사이에서 당연하다는 듯이 돌아다니는 밈 중에서 '3줄요약 해주세요'라는 말이 문득 생각납니다. 어쩌면 소설에서만큼은 이 말을 조금 내려놓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소설을 읽는 건 그저 길기만 한 글 덩어리에 시간낭비를 하는 게 아니잖아요. 세상에는 3줄요약을 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 많고, 그것만으로도 우리가 소설을 즐겁게 읽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에는 충분하니까요.